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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교

19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제26화 밀실의 흉부를 꿰뚫은 탄환-18년 권력의 종말


"워메 이게 뭔 소리여?"

곰소댁의 외마디 소리가 소리가 오목교 판자촌에 메아리쳤다.


새벽 4시 10분경, 오목교 아래 판자촌은 숨 막히는 어둠 속에 웅크려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으나, 그 맑음이 오히려 흙벽과 함석 지붕을 더욱 차갑게 비추었다. 가로등조차 드물어 새벽의 푸른빛은 희미했고, 촘촘히 붙어선 집들 사이의 좁은 골목은 지독한 불안감처럼 깊은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곧 초겨울로 접어들려는지 공기는 섭씨 6.9도. 얇은 담요 아래에서도 새벽의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냉기는 곧장 폐부로 스며들었고, 누군가 기침이라도 하면 그 소리가 얼어붙은 새벽 공기를 타고 유난히 크게 울렸다.

미세한 동풍이 0.54미터의 속도로 흐르며, 비좁은 골목의 묵은 먼지와 연탄재 냄새를 아주 느리게 실어 날랐다. 그 미약한 바람은 낡은 창호지 문을 아주 살짝 떨게 만들었을 뿐, 판잣집의 단열 없는 벽을 통과해 들어오는 차가운 밤공기의 습격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마당에 쌓아둔 연탄 더미 위에는 간밤의 찬 이슬이 내려앉아 서늘하게 반짝였다. 이 고요함은 평소의 잠잠함과 달랐다. 곧 해가 뜰 것이지만, 이 가난한 동네 사람들에게 오늘의 햇살이 가져다줄 것은 희망이 아니라, 하루의 고된 노동과 불안한 생계일 뿐이었다. 모든 것은 이 차갑고 움츠러든 새벽 공기 속에서 긴장하며 다음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쾅! 쾅! 쾅!

"언능 일어나서 테레비 좀 쪼까 틀어봐. 언능."

! 쾅! 쾅!

갑작스럽고 거친 문 두드림 소리가 낡은 문틀을 뒤흔들었다. 두드림이라기보다는, 누가 문을 부수는 듯한 굉음이었다.

"정희, 영석이 총각, 언능 일어나!"

곰소댁의 목소리가 섞여 날카롭게 찢어졌다. 두 여인의 비명 같은 다급함은 단순한 아침 인사가 아니었다. 잠결에 듣기에도 공포와 혼란이 가득했다.

영석은 얇은 이불을 걷어차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순간 데모 전날 밤 경찰이 들이닥치는 악몽을 꾸었나 싶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누나, 무슨 일이야?"

정희 역시 잠이 달아난 상태였다. 그녀는 낮에는 공장, 밤에는 관리부와 민우 사이의 위험한 이중생활을 하느라 잠귀가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찬 바닥에 발을 디뎠다. 냉기가 곧장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아줌마 무슨 일이세요?"

정희가 낡은 문고리를 잡아 당기니 '덜컥!'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곰소댁이 방 안으로 쏟아지듯 들어왔다. 그녀는 머리를 감다 온 듯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뚝 뚝 떨어지고, 눈은 공포와 흥분으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

"라디오에서 뭐라고 씨부려쌌는디 큰일이 났는개벼. 이런 판국에 잠이 와? 언능! 테레비 언능 틀어봐!" 곰소댁이 영석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아줌마 뭔 일이세요?"

잠이 덜 깬 영석이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진공관 TV의 로터리 스위치를 돌리며 물었다.

"지금 이 판국에 뭔 일이냐고 물어봐야 쓰겄어? 대통령이 죽었디야! 유신이고 나발이고, 그 냥반이 '서거'를 허셨다고 헌당게."

곰소댁의 입에서 나온 '대통령'과 '죽었다'라는 두 단어는 작은 방 안의 낡은 가구들과 싸구려 벽지를 통과하여 영석과 정희의 귀에 믿을 수 없는 폭음처럼 박혔다.

영석은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어제 광화문의 그 평온한 정적이 사실은 권력의 심장부가 뚫리기 전의 기묘한 고요였던가. 그리고 수아에게 말해준 억압의 진실이 한순간에 거대한 파도를 맞은 듯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정희는 숨을 들이마시며 잠시 말을 잃었다. 자신이 어젯밤 민우와 나누었던 희망의 대화,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제의 마지막 순간이 스쳤다.

'정희 씨.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시대는, 대학 졸업장이나 집안 배경 같은 하찮은 것들을 따질 만큼 한가하지 않아요.'

민우가 외쳤던 그 말. 그 말처럼, 그들을 짓누르던 거대한 시대 자체가 총알 한 방에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진공관 TV는 아직도 '웅'소리만 내고 있다.

"뭘 혀! 테레비! 비상계엄령랑게! 세상이 어떻게 될란지 알아야 할 거 아니여!"

"진공관 TV라 화면이 나오는데 시간이 좀 걸려요."

영석이가 TV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드디어 장중한 음악이 깔리면서 아나운서의 엄숙한 목소리가 차가운 새벽의 긴장을 뚫고 터져 나왔다.


방송에서는 10월 26일 밤 비상계엄사태가 선포되었고, 10월 27일 새벽 4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정승화' 명의로 발표되었다는 점을 계속해서 내보내고 있었다.

① 일체의 옥내외 집회는 허가를 받아야 하며 시위 등 단체활동을 금한다.

② 언론·출판·보도는 사전에 검열을 받아야 한다.

③ 야간통행금지는 22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로 한다.

④ 정당한 사유 없이 직장이탈 및 태업행위를 금한다.

⑤ 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 행위를 금한다.

⑥ 항만 및 공항의 출입은 검열을 받아야 한다.

⑦ 전문대학을 포함한 모든 대학은 별명이 있을 때까지 휴교 조치한다.

⑧ 일체의 집단적 난동·소요 및 기타 범법행위를 금한다.

⑨ 주한 외국인의 활동은 이를 보장한다.

상기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구금·수색하며 엄중 처단한다


역사는 이렇게 일반 국민이 깊게 잠든 어두운 밤에 결정되기도 하고, 아침이 되면 기정사실이 된다. 곰소댁이 시간을 알기위해 켜놓은 라디오 소리는 이른 아침 영등포시장으로 나가기 위해 머리를 감던 그녀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정희는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그녀의 눈은 불안감으로 가득 찼지만, 그 밑바닥에는 어제 민우가 이야기했던 ‘희망’이라는 단어가 작은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동시에 회사 분위기가 어떻게 바뀔지, 민우와 자신은 안전할지 등 온갖 잡스런 생각이 떠오르면서 머릿속이 매우 복잡해졌다.

흑백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판자촌의 좁은 방을 착 가라앉게 만들었고, 비장함이 섞여 있는 듯 매우 낮고 묵직한 소리다. '대통령 서거', '비상계엄령 선포'와 같은 단어들이 뿜어내는 공포와 낯선 충격이 곰소댁, 정희, 그리고 영석을 먹구름처럼 덮치고 있었다.



영석은 낡은 텔레비전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얼어붙었다. 며칠 전 태종이가 하던 말들이 이렇게 갑작스럽고 폭력적인 형태로 현실화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의 심장은 두려움과 격앙된 기대 사이에서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누나! 정말 끝난 걸까? 유신정권이?"

정희는 차가운 손으로 떨리는 입술을 감쌌다. 그녀의 머릿속은 오직 민우로 가득 찼다. '이 혼란 속에서 민우 씨는 무사할까? 어쩌면 이 사건이 그들에게 기회일까, 아니면 더 큰 위험의 시작일까?' 출근할 생각도 잊은 채, 그녀는 손바닥으로 벽의 거친 나무 질감을 힘주어 눌렀다. 어제의 포옹이, 그 뜨거운 심장 소리가, 마지막 작별 인사였을까봐 두려웠다.

그때, 방안에 들어올 때부터 계속 서있던 곰소댁이 갑자기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억센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눈물은 이미 손가락 사이로 비집고 흘러나왔다.

"워매, 워매, 이 일을 어쩐당가?"

곰소댁은 흐느꼈다.

"아이고, 아무리 미워했어도 그렇지. 그 냥반 때문에 우리 신세가 이 모양 이 꼴로 살았는데, 그래도 갑자기 홀랑 가버리다니… 저리 허망할 수가 있단 말이여? 18년 동안 꼼짝 못하고 시계처럼 딱딱 돌아가게 하던 사람이었는디."

평생 그 독재자의 정책 때문에 시장에서 억압받고, 아등바등 살아가느라 허리가 휜 곰소댁이었다. 그녀는 박정희를 증오했지만, 그가 사라지자 세상이 뿌리째 뽑힌 듯한 공황과, 한 시대의 거인이 스러진 것에 대한 비탄, 그리고 연민 등, 복잡한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그녀에게 그분의 부재가 가져올 미래는, 그분이 있을 때의 확실한 고통보다 더 알 수 없는 카오스였다.


정희는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출근을 서둘렀다. 여공들의 출근 시간이 되어서도 거리는 평소와 다르게 텅 비어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회사까지 걷는 내내, 그녀의 발걸음은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공장 정문에 도착하자마자 느껴지는 분위기는 이미 달랐다. 평소 철저했던 경비는 어딘가 허술했고, 공장 내부에서는 정작 소란스러워야 할 생산동이 아닌 관리동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정희는 오늘 챙겨야 할 서류를 정리한 후, 늘상의 일과처럼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생산동을 살피고자 그 건물 입구에 들어섰다, 그리고 모든 자들이 나사가 한 두개 빠진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기계 앞에 앉아 있는 여공들은 손에 일이 잡히지 않는 듯했다.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대신 불안한 속삭임과 묵직한 침묵이 공기를 채웠다. 몇몇 여성들은 잘 됐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대부분 앞으로 회사가 어떻게 돌아갈지, 노동자들의 삶이 더 나아질지, 아니면 계엄령 아래서 또 다른 억압과 구속이 있을지 몰라 불안해 했고, 누군가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속시원하게 말해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때, 공장 사무실 쪽에서 날카롭게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뭐 하고 있는 거야! 당장 일하지 않고. 계엄령 포고문 안 봤어?”

제1항, 일체의 옥내외 집회는 허가를 받아야 하며 시위 등 단체활동을 금한다.

제4항, 정당한 사유 없이 직장이탈 및 태업행위를 금한다.

제8항, 일체의 집단적 난동·소요 및 기타 범법행위를 금한다.

이상우는 제1항, 제4항, 제8항을 또박또박 힘주어 외치며 마치 자기 세상이라도 온 것처럼 거들먹거렸다. 그러나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그 역시 허둥대는 모습이 역력했고,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그의 얼굴은 얼굴은 붉은 색 피부가 번들거릴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공장 바닥에 침을 뱉어 가며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태업이란 일을 게을리한다는 의미야, 이게 비상계엄령 아래서 할 짓들이야?! 당장 작업에 복귀해서 죽어라 일하라고! 회사 문 닫으면 너희들 밥줄 누가 책임질 것 같아?! 닥치고 일해!”

정희는 소리를 질러대는 관리부장의 얼굴이 오늘따라 꼭 한 마리 생쥐 얼굴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분노는 통제력을 잃은 공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18년간 윗사람의 권력에 기대어 하급 노동자를 감시하고 억눌러 왔던 그의 존재 이유 자체가 흔들릴지도 모르고, 공장 내에서 그동안 곤히 잠자고 있던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광기를 드러내며 공장 통제력이라는 권위를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모습이었다.


정희는 관리부장의 히스테리를 보며 묘한 승리감과 동시에 깊은 연민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를 두렵게 만들던 권력이 사라졌다는 기쁨은 잠시, 이제 이 혼란을 누가 수습하고, 이 여공들의 불안한 미래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 하는 막막함이 밀려들었다. 멀리서 훔쳐 본 민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면서 정희의 존재를 짐짓 모른 체 하고 있었다.

민우는 작업대 앞에서 기계를 손보고 있었다. 그의 손은 능숙하게 기계를 다루고 있었지만, 눈빛은 이미 수십 번 정희가 서 있는 방향, 그리고 그녀가 움직이는 동선을 오가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정희와 눈을 마주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공장 바닥을 짓밟고 다니는 관리부장 이상우의 날카로운 시선이 모든 것을 스캔하고 있다. 이상우는 단순히 작업을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불복종의 싹을 솎아내기 위해 사냥하는 맹수처럼 보였다. 민우의 심장 박동은 마치 기계의 진동처럼 빠르고 불규칙했다. ‘계엄령’이라는 단어가 민우에게도 즉각적인 공포를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계엄령은 곧 정보 통제의 강화와 검열을 의미한다. 지금껏 그가 숨겨왔던 신분, 그가 해왔던 모든 활동이 한순간에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느끼는 불안은 단지 대통령의 죽음이나 정권 교체의 혼란 때문만은 아니다.


계엄령 포고문에는 “② 언론·출판·보도는 사전에 검열을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다. 언론 통제가 강화되면, 중앙정보부와 경찰의 힘은 더욱 막강해질 터였다. 그들은 이 혼란을 틈타 사회 불안 요소를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자신들 마음대로 블랙 리스트를 작성하고 체포할 것이다. 만약 이 사태를 이용해 중앙정보부가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 숨어 있는 ‘불순 세력’을 색출하라는 특명을 내린다면? 그들은 생산직 노동자 명부와 과거의 기록을 샅샅이 뒤질 것이다. 민우의 학력, 배경, 이력서에 적힌 사소한 오류 하나라도 잡히는 순간, 그는 ‘태업행위를 금한다’라고 하는 포고문을 위반한 범법자가 아니라, 체제를 전복하려는 빨갱이로 낙인찍힐 터였다.

또한 이상우는 지금 자기 세상이 무너질까 봐서 발버둥 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계엄령은 그에게 합법적인 폭력의 도구를 쥐어줄 수도 있다. 그는 18년간 쌓인 악감정을 해소하고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정희처럼 노동운동에 은밀하게 연루된 여공들을 본보기로 희생시킬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정당한 사유 없이 직장이탈 및 태업행위를 금한다.”라고 하는 포고문 제4항은 노동자들의 모든 불만을 억압하는 총알이 될 것이 뻔하다. 민우는 이를 악물었다.

민우의 가장 큰 걱정은 바로 정희였다.

‘정희 씨가 위험하다. 이 혼란을 틈타 이상우가 정희 씨를 향한 개인적인 앙심을 공적인 ‘계엄 위반’으로 덮어씌우려 할지도 모른다.’

민우는 그녀가 어제 자신과 나눈 희망적인 대화,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는 그 작은 불꽃때문에 혹시라도 경솔한 행동을 할까 봐 두려웠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억압적인 뚜껑이 잠시 들렸을 뿐, 더 거대하고 예측 불가능한 짐승이 그 틈으로 기어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기계를 만졌다. 소리를 내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성실한 노동자인 척 가장해야 했다. 그의 눈은 생산동의 방적기와 방직기 소리, 그리고 여공들의 불안한 얼굴을 오갔다.

“우리는 지금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민우는 속으로 되뇌었다. 대통령의 죽음이 유신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다음 찾아올 질서는 군홧발 소리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군홧발은 민우 자신의 위장된 신분과 정희의 불안한 존재 위를 가장 먼저 짓밟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하는 척하며 무거운 침묵 속에서 정희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보냈다.

‘정희 씨! 움직이지 마십시오.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은 모두가 가장 조용해야 할 때입니다.’


정희가 출근하고 난 뒤, 영석은 계속해서 TV가 전하는 뉴스에 눈과 귀를 집중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선 채 공포와 희망 사이를 오가던 그때, 그의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은 오직 하나였다.

‘수아는 잘 지내고 있을까?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수혁이 형은 안전한 것일까?’

그는 가슴이 답답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태종이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싶지만 수아의 근황이 더 궁금했다. 그래서 버스정류장 부근에 있는 공중전화부스로 달려가 수아네 가게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아저씨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수아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학교로 갔다.

오전 9시 무렵, 광화문을 거쳐 성대로 가는 길은 온통 잿빛 분위기였다. 어제 지나가면서 봤던 경복궁 앞이 그렇게 시끄러웠나 싶어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사건 발생지인 궁정동 안가에서 김계원 비서실장 등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이송된 곳이 종로구 소격동에 있는 국군서울지구병원이고, 도착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사망상태였다고 한다. 그리고 국군보안사령부도 국군서울지구병원과 바로 이웃해 있다. 영석이가 시간 날 때 마다 찾아와 영화를 보며 놀다가는 ‘문화의 해방구’ 불란서문화원도 바로 그 인근에 있는 사간동에 있다. 그러다 보니 영석은 국군보안사령부나 국군서울지구병원이 낯설지 않다. 그런데 바로 그 장소에서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역사적인 사건들이 벌어졌다는 시실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

성균관대학교 정문 앞에는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고요가 내려앉아 있었다. 물론 토요일이라 수업이 없어서 학생들의 숫자가 적겠지만, 평소에도 토요일과 일요일에 등교하여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은데, 전날 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비상계엄 전국 확대 소식은 학생들의 잠을 빼앗아 갔고, 그 여파가 그다음 날의 캠퍼스 분위기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듯 지나가는 학생들의 수가 현저하게 적었다. 명륜동 골목을 따라 걸어오는 사람마다 어딘가 발걸음이 느렸고, 서로의 표정에는 한 문장도 없는 질문만 겹겹이 쌓여 있었다. 정문은 평소와 똑같이 열려 있었지만, 지나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등굣길이던 아침 시간은 대개 활기가 넘쳤지만, 오늘은 마침 토요일이기도 해서 그런지 텅 비어 있었다. 교문 아래로 드리워진 그림자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정문 기둥의 붉은 벽돌조차 평소보다 더 차갑게 보였다.

강의실로 향하는 계단은 비어 있었고, 학생들이 모여 웅성거릴 법한 문과대학 앞 벤치에도 학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영석이 다시 대성로를 걸어 내려오는데, 몇몇 학생들이 서울대학교가 새벽에 전면 휴교령을 내렸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내려가고 있었다.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서울대는 오늘부터 수업 중단이래”라고 말하면, 옆에 서 있던 학생들이 “그래?”라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서울대에 내려진 휴교령은 공식 발표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실제 수업일수가 얼마 안 되는데 휴교령이 내려진다면 2학기도 이제 파장일 것이다.

성균관대학교는 공식적인 휴교령을 발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 오전 풍경만 놓고 보면 휴교와 다름없는 정지 상태로 보였다. 정문 앞에는 라디오를 들고 온 학생이 작게 볼륨을 낮춘 채 속보를 확인하고 있었고, 그 주위에 몇 명이 모여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라는 물음만 반복했다. 성균관대학교 정문 앞 풍경은 어느새 ‘학교의 입구’라기보다 ‘한 시대가 갑자기 숨을 멈춘 자리’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학생들의 걸음은 매우 조심스러웠고, 서로 나누는 말도 매우 짧았다.

수아와 점심을 먹어야 할 텐데 수아가 무엇을 먹고 싶어할지 몰라 영석은 성대 정문앞에서 수아를 보자고 했었다.

“삼춘!”

영석은 버건디 색상의 스커트 수트에 단풍 색깔을 연상시키는 머플러를 한 수아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느꼈다. 우아함과 여성스러움이 특히 돋보였다.

“너무 예쁜데?”

“비행기 태우지 마.”

“아냐. 정말 예뻐.”

“정말이지? 그런데 오늘 같은 날, 이런 대화가 맞는 걸까?”

수아 역시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우리 어디 가서 점심이나 먹자.”

“뭘 먹고 싶어?”

“난 찌개가 먹고 싶은데.”

“동태찌개 어때? 아주 잘하는 집이 있는데.”

영석은 동태찌개라면 ‘홍성집’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좋아.”

홍성집에도 손님이 거의 없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아니 네놈은 올 때마다 데리고 오는 여자가 바뀌는 겨?”

영석은 깜짝 놀랐다. 지난번에 태종이랑 정화와 같이 와서 술 마신 것을 할머니가 정확히 기억하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

“아이고. 엄마! 그때 온 여학생은 영석씨 친구 태종이 여자 친구야. 울 엄마도 참 주책이야.”

할머니 말씀에 예리하게 영석이를 바라보던 수아가 안도하는 눈치가 보였다. 순간 영석은 정화에 관한 이야기나 미팅 이야기를 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할머니 딸이 왼쪽 눈을 찡긋하며 입다물라는 신호를 보냈기에 참았다.

“와! 여기 동태찌개 정말 시원하고 맛있다.”

“그렇지? 난 이 집 동태찌개가 제일 맛있어. 이것 한 양푼이면 막걸리 두 병은 거뜬하거든.”

“그런디, 네놈은 외상값 언제 갚는 겨?”

영석이는 진땀이 났다.

“엄마!”

또 딸이 ‘빽’소리를 질렀다.

“영석이 학생 학생증하고 세이코 손목시계 맡겨놨잖아. 과외 수업비 받으면 일괄적으로 계산하는데, 왜 그래? 그리고 예쁜 여자 친구하고 왔는데 그렇게 망신을 줘야겠어?”

“어머! 어머! 저 괜찮아요. 우리 삼춘이 못 갚으면 제가 대신 갚아줄게요. 외상 얼마든지 주세요.”

"숙질간이여? 그럼 여자친구가 아니고 질녀구만"

"아녜요. 할머니! 저 이분 여자친구예요. 제 친구가 이분 조카구요. 제가 그애 친구예요. 우리 삼춘이 딴 여자랑 오면 나중에 제게 알려주세요."

"어따 복잡허다. 내가 똑똑히 봐두었다가 바람피면 알려줄 팅게 그리 알어."

"네! 꼭요?"

수아가 진땀을 흘리는 영석이를 바라보며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할머니 저 체하겠어요.”

영석이가 이마의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야 이눔아! 천년만년 살 것 같던 대통령놈도 저렇게 죽어삐리는 시상인디 네놈은 안 죽겄냐? 네놈 죽어뻔지면 내가 어디 가서 술값 받으라는 겨?”

“아이고! 엄마가 더 빨리 돌아가셔. 앞길이 구만리같은 사람에게 왜 그래?”

수아가 또 ‘까르르’ 웃으며 배를 움켜쥐었다.

“그나저나 수혁이 형님은 어떠신가?”

쌀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 다시 매콤한 동태찌개가 담긴 양푼에 숟가락을 집어넣으며 영석이 물었다.

“모르겠어. 전화를 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우리 다음 주에 면회나 갈까?”

“그러자.”

숨 막힐 것같이 답답했던 명륜동 공기가 할머니의 우스갯소리에 조금은 숨통이 트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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