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없는 방문객

_조르바를 닮은 원고를 만났을 때

by 축성여석

불쑥 찾아온 원고

전화벨은 언제나 급작스럽다.

교정을 보다가 울리는 소리에 수화기를 들었다. 1층 나비나라박물관 학예사였다. 출판사에 손님이 와 있는데, 편집이사님을 꼭 만나서 해야 할 말이 있다며 기다리고 있다는 전언이었다.

약속 없이 불쑥 찾아오는 방문객은 드물지 않다. 대부분 책을 내고 싶은 마음을 품고 온 사람들이다. 솔직히 바쁜 시간대에는 반갑지 않다. 이런 만남은 대개 긴 설명과 과도한 기대만 남기고 끝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1층 뮤지엄숍에 앉아 있는 C 선생님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잠시 멈칫했다. 백발에 키가 훤칠하고, 배우처럼 인상이 또렷했다. 인물이 좋다는 건, 어느 자리에서든 빠르게 작동하는 경쟁력이다. 인사를 나누자 그는 가방에서 두툼한 책자를 꺼냈다. 복사집에서 제본한 원고 뭉치였다.

“15년 동안 54개국을 여행하며 커피를 주제로 쓴 글입니다. 책이 될 수 있을지 한 번만 봐주십시오.”

원고를 내미는 눈빛에 숨길 수 없는 설렘이 있었다. 나는 말없이 받아 표지를 넘겼다. 프롤로그와 목차, 장 구분은 엉성했지만 책의 형식을 흉내 내려 한 흔적이 보였다. 직접 그린 삽화와 사진 자료도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몇 장을 넘기자 표정이 굳는 걸 느꼈다. 여행 경험은 풍부했지만 문장은 자기 흥에 들떠 산만했고, 이야기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편집자의 눈으로 보면 이 상태로는 책이 되기 어려웠다.

나는 일부러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흥미롭긴 합니다만, 저희 출판사의 색깔과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다른 곳을 알아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편집이사님 이야기를 듣고 일부러 찾아왔습니다."

그가 입에 담은 사람은 한때 나와 함께 D출판사에서 일했던 편집부 부하 직원이었다. 나에 대해 조금 과장해 말한 모양이었다.

"간절히 부탁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 번만 제대로 읽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는 원고를 내 손에 쥐여주듯 놓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먼지 쌓인 원고와 조르바의 온기

그날 이후 원고는 책상 구석에 놓여 있었다. 가끔 펼쳐보다가 그대로 덮었다. 그렇게 먼지만 쌓인 채 여섯 달이 흘렀다.

그런데도 책장을 넘길 때마다 묘한 감각이 남았다. 커피 향 같기도 했지만, 더 정확히는 문장 사이사이에 배어 있는 ‘살아본 사람의 온기’였다.

“세르비아의 한 카페에서 마신 쓴 커피가 내 인생을 달게 만들었다”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그는 단순한 여행자가 아니라 삶의 미각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버릴 원고가 아니라, 다듬어야 할 원고였다.

그 생각을 하고도 며칠을 더 망설였다. 그 원고를 출판하게 된다면, 원고를 다듬고 정리하는 일은 모조리 내가 떠맡아야 할 짐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출판사 대표에게 원고의 존재를 보고했다. 영업 감각이 빠른 대표는 잠시 훑어보더니 진행하자는 쪽으로 판단했다.

그때부터 원고와의 싸움이 시작됐다. 문장을 고치고, 순서를 바꾸고,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히 덜어냈다. 흩어진 에피소드를 하나의 시간축으로 꿰는 작업은 생각보다 고되었다.

그 과정에서 자주 떠오른 인물이 있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조르바, 그리고 결국 카잔차키스 자신의 묘비에 새겨진 그 문장.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다.”

계산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이성보다 삶을 먼저 끌어안는 인간. 그 자유를 살아낸 인물을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문장의 요건에 많이 어긋난 글을 다듬을 때는 정신적인 에너지 소모가 크다. 썼다가 지우고, 끙끙대다가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들고 있던 빨간 펜을 던져버릴 때도 있다. 아주 더디게 원고가 3꼭지 정리되면 원고의 주인인 C 선생님에 검토해 보라고 전했는데, 며칠이 지나면 교정한 원고를 가지고 직접 출판사를 방문하는 정성을 보였다. 교정지를 들고 출판사를 찾는 그의 손에는 늘 직원들을 위한 주전부리가 한가득 들려 있었다. 원고를 들고 올 때마다 C 선생님은 다소 과장되게 말했다.

“전문가 손길이 들어가니까, 참말로 글이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그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원고는 결국 두 권으로 완성되었다. 《세계 커피기행》 1·2권.

커피기행 1.png

10년 후, 여전히 춤추고 있어요

책이 나온 지 10년이 지났지만, 선생님과의 연락은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세상을 다니고, 여전히 커피 한 잔에 인생을 담는다.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내가 묻는다.

“요즘도 춤추고 계세요?”

돌아오는 답은 늘 같다. “춤추고 있지요. 춤추고 있어요.”

편집자는 원고를 고르는 사람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니, 가끔은 원고가 편집자를 고른다는 생각이 든다.

약속 없는 방문객이 남기고 간 것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내가 어떤 편집자로 늙어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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