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40대 남자가 세상을 살아가는 법

by 바다가 보이는 곳

주의! 필경사 바틀비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허먼 멜빌은 바다 덕후이다.


스무 살 때 수습선원이 되었고, 스물두 살 때는 포경선을 탔으며, 스물네 살에는 해군에 입대했다. 서른두 살에 그 유명한 모비딕을 썼다. 이후로도 마흔한 살 때 동생이 선장인 배를 타고 여행을 했고, 심장 발작으로 사망하기 3년 전에는 ‘존 마르와 선원들’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력만 보면 바다에 미친 사람이지 않나 싶을 정도인데, 실제로 모비딕을 읽으면서 작가가 바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사실 내가 가장 잘못알고 있던 책 중의 하나가 모비딕이다. 나는 이 책이 인간과 고래의 사투를 첫장부터 마지막까지 상세하게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래에게 복수하려는 선장의 고뇌와 사투, 뭐 이런 것들이 1천 페이지에 이르는 책에 빼곡하게 써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두꺼워서 지루한 책일거라 생각했다. 둘 다 틀렸다.


향유고래와 싸우는 장면은 끝부분 잠깐이고, 책의 대부분은 사람들 사이의 일 그리고 바다에 대한 지식을 뽐내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었느냐? 아니다. 당시 읽었던 고전들중 손에 꼽힐만큼 재미있었다. 시종일관 명량함과 유쾌함을 잃지 않는 것이 좋았고(물론 마지막에는 비장함도 있지만) 낯선 세계를 간접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나면 2회차를 읽을 계획이다.


이런 그가 쓴 작품중에 ‘필경사 바틀비’가 있다. 필경사는 무엇인가? 공문서등을 대신 써주는 사람이다. 제목만 알고 있는 소설이었는데 우연히 읽게 되었다. 바다하고는 눈꼽만큼도 관계없는 이야기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월가의 성공한 변호사가 필경사를 고용한다. 그의 이름은 바틀비인데 시키는 일은 잘 해낸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무언가를 시키면 ‘저는 안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라고 대답한다. 그러더니 언젠가부터는 아무일도 하지 않게 되고, 변호사는 그가 사무실에서 숙식까지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변호사는 그를 쫓아내려하지만 시끄러운 방법(경찰을 동원한다던가)은 원치 않는다. 결국 기묘한 동거를 하다가 변호사는 그를 내쫓을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아예 사무실을 옮겨 버린다. 이후 새로운 건물주가 그를 감옥에 보내고, 바틀비는 그 안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바틀비가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추측만 할 수 있는 단서가 주어지는데, 그가 ‘죽은 수신인에게 가는 우편물’ 처리 담당이었음이 밝혀진다. 그게 행동의 이유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처음에 ‘저는 안하는 편이 좋겠습니다’라는 대사를 보았을때, ‘아, 멜빌은 할 말은 하는 MZ의 출현을 예고했구나’하고 감탄했다. 그런데 읽다보니 그게 아니었다. 소위 요즘 세대는 해야할 말을 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지만, 바틀비는 과거의 상처 때문(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지만)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그것 외에는 크게 할 말은 없는 소설이었다.


솔직히 생각할꺼리가 많거나 울림을 주는 소설인지는 잘 모르겠다.(내 독서력의 한계일수도) 그런데, 페이지 잘 넘어가고, 딱 읽기 좋은 분량이다. 하루 출퇴근 시간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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