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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현Jihyun Park Aug 02. 2024

긴 여정이다

소소한 행복

밤 새 달리던 고속버스가 아침 5시에 장춘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아침을 먹고 북경으로 떠나야 하는데 우리 팀 7명 중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나와 아저씨이다

아들은 중국어와 한국어를 너무 잘하다 보니 보는 사람마다 중국애 인가 한다. 5 살인데 두 개 나라말을 유창하게 하는 아들이 대견스럽다.


장춘 역에 내리니 새벽이지만 새벽 장사를 시작하는 장사꾼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하며 시장가에 연기들이 풀풀 난다. 기름냄새, 두부 만드는 콩물 냄새, 가미안에서 익어가는 빵 냄새 등등, 어재 저녁을 먹은 둥 만둥 했더니 아침 5시부터 배에서 꼬르륵꼬르륵 소리를 낸다


장춘을 들어본 적 있지만 처음 온 곳인데 너무 시골 같았다. 나는 장춘 하면 번쩍번쩍 하는 대 도시로 알았는지 골목골목 더럽고, 춥고, 말씨도 다른 것 같고,,,


그때 아저씨는 본인은 장춘에 있는 레스토랑에 와서 주방에서 주방장으로 일 한 적 있어 장춘을 잘 알고 있다며 우리를 데리고 아침을 먹으로 앞장섰다.


북한 사람이 중국에서 큰 레스토랑에서 주방장을 했다니 처음엔 믿기지 않았지만 훗날 그의 요리솜씨에 또 반하게 된 나이다.


그렇게 우리는 아저씨가 이끄는 식당으로 아침 먹으러 갔다. 중국인들은 아침에 빵 혹은 콩물과 함께 먹는 거즈( 난 그렇게 불렀다) 혹은 요우티아오라고 부르기도 하고 꽈배기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꽈배기와는  조금 다른 기름에 튀긴 것이다. 그렇게 아침을 먹으려고 하는데 난감한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함께 떠난 사람들이 자신들은 아침에 꼭 밥을 먹어야 한다며 밥을 찾는데,, 장춘에도 사복입은 공안들이 탈북자들을 잡기 위해 많이 니와있고 장춘에서

잡힌 사람들도 많기에 우리는 싸울수도 없고,,,

중국인들은 아침에 시장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 별로없기에 밥을 파는 곳은 없고 더더욱 우리 한국인들처럼 국물 요리는 더더욱 없다.

밥이 없다고 해도 계속 밥 투정 하는 그들 보면서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아직도 갈 길이 먼 우리이기에 화를 내지 못했다.


아저씨는 중국식 감자반찬 ( 감자를 채 썰어서 더운물에 살짝 데쳐 묻혀내는 반찬) 울 주문하고 또 콩으로 만든 반찬도 주문하면서 그 사람들 입맛을 맞춰주려고 하는 것을 보는데 아저씨도 나처럼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오지만 참고 있는 것을 봤다.


그렇게 아침 식사 끝난 후 두 명의 북한 여성들이 우리와 합류하였고 우리 팀은 9명이 되었는데 후에 온 두 명의 여성들은 중국에 몇 년 설다 보니 중국어를 잘하고 있어서 별로 신경을 안 썼다.


아침밥 먹었지만 지금부터 우리의 진짜 여정이 시작이된다. 연길에서 장춘까지는 밤 버스이기에 공안들 검열은 없었지만 북경까지 가는 길에는 수없이 초소들을 지나가야 하기에 그 고비를 발 넘겨야 한다.


일단 가족 단위로 앉기로 했고 나와 아들 그리고 아저씨도 한 가족처럼 앉았다. 우리는 누구 봐도 의심이 안 될 정도로 가족 같았다

아들의 유창한 중국어 실력에 또 아저씨와 아들이 뭔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하는지 하하 호호 웃음이 떠나지 않다 보니 차 안에 분위기도 훈훈하다.


그렇게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어느 초소에 멈췄고 공안들이 올라왔는데, 북한에서 온 가족들 보고 우리는 자는 척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우리가 앉아서 북경으로 가족들이 여행을 간다고, 버스 멀미로 이 사람들이 지금 잠든 상태라고 했다.

공안들이 운전수 쪽으로 머리를 돌리니 운전수가 머리까닥하는데 아마 신호 같기도 했고, 심장이 금방 밖으로 떨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 공안들이 갑자기 어른이 아닌 우리 아들에게 어디서 왔는지 등 질문을 하는데 아들이 유창한 중국어로 어디서 왔고 아침은 콩물에 꽈배기 하나 먹었는데 배고프다며 어디서 밥을 먹어야 되냐고 오히려 되물었다. 나는 함께 웃어야 했다. 그래야만 중국어를 알아듣는다고 공안들이 판단하기 때문이고 아저씨도 배고프냐며 다음에 버스 서면 맛있는 거 먹자며 아이를 안았다.  공안들이 웃으면서 나에게 왜 애 간식은 하나도 안사줬냐며 다음에 버스 서면 맛있는 거 많이 먹으라고 아이에게 이야기하면서 내린다. 그리고 운전수에게 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낸다


긴 숨을 내 쉬면서 나는 북한을 떠올렸다. 북한과 중국은 여전히 전체주의, 공산 정권 이어서 길에도 초소들이 많이 있어서 주민들 여행을 통제한다. 북한은 다른 도에서 다른 도 로 혹은 내가 사는 구역에서 다른 지방으로 여행을 가려고 해도 여행 증명서가 필요하다. 여행 증명서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중국도 초소들이 있어서 공안들이 도로를 지나가는 차 혹은 버스들을 세워서 아이디 검사를 수시로 한다.


여행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살아가는 전체주의 독재국가에서 겨우 빠져나온 것이 공산당 국가이며 앞으로 가슴을 조이는 여정들이 얼마나 더 앞에 놓여 있는지 그 누구도 모른다.


그렇게 첫 초소는 무사히 넘었고 다음 휴게소에서 간단히 먹을 것을 샀고 운전수에게도 음식을 좀 사줬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뇌물이지만 운전수는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여러 개 초소들을 지났지만 검문이 없어서 조금조금 마음에 안정을 찾아가는데 큰 검문소가 우리 앞에 있다. 북경으로 들어가기 전 검문소이다. 마치 평양을 들어가기 전 검문소와 같이 모든 여행객들이 버스에서 내리면 공안들이 올라가서 짐 검사를 임의로 하고 또 아이디 검사도 한다. 마지막 북한을 떠날때 무산으로 가기 위해 서비스차( 북한에는 전기가 없어서 기차가 다니지 못하니 술 혹은 담배를 운전수에게 뇌물로 주면 목적지 까지 태워주는 자동차가 있는디 우리는 서비스차 라고 한다. 이런 자동차는 적재함이 있는 화물차 같은 것 인데 여기에 사람들이 빼곡히 앉으면 다리도 움직일수가 없다) 를 타고 가다가 고무산 검문소에서 내려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 당시 나는 감옥에서 금방 나온 상태라 북한 공민증이 없었고 내 몰골도 말이 아니였다. 그때 브로커가 ( 나를 중국에 팔러 가는 브로커) 날 보고 검문소에 들어가면 안 되니 가만히 뒤로 빠져서 여기 고무산에 사는 사람처럼 철길을 따라서 그냥 걸으라고 한다. 그러면 본인들도 검문이 끝나면 따라올테니 걸어서 고무산 다른 역 까지 가라고 했던 그 순간이 떠올라 내 몸의 모든 피가 식어서 얼음으로 냉각 되는 것 같이 나는 파릇 파릇 떨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들이 옆에 있고 중국어를 아는 우리가 물러서면 다른 사람들은 누가 지켜야 되는지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지 다시 나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다행히 아저씨 그리고 나 에겐 가짜 아이디 있고 후에 우리와 합류한 두 명의 여성에게도 아이디가 있지만 북에서 온 가족들과 다른 아저씨는 아이디가 없다. 긴장하지 말고 웃으라고, 공안 얼굴 쳐다보지 말라고 아저씨는 당부한다. 아들과 북에서 금방 온 집 아들이 함께 노는 척한다. 그 집 아들은 그 당시 15살 아이인데 잘 생겼고 얼굴에도 귀티가 나서 북한 아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때 공안이 두 명의 여성들에게 어디로 가냐며 묻는다. 그들이 유창하게 중국어로 이야기하면서 웃으면서 이야기 주고받는데 다행인지 아니면 행운인지는 모르지만 아이디 검사는 없었고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묻지는 않는다.


그리고 승객들에게 다시 버스를 타라고 하는데 버스 계단을 올라가려고 하니 발이 움직이지 않아 계단을 밟을 수가 없었다. 그때 아저씨가 내 팔을 잡아주면서 긴장을 풀라고 하며 웃어준다.


그 웃음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주저앉았을 것 같기도 하지만 아들이 있기에 또 힘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웃어주던 아저씨 웃음이 나에겐 엄마로서의 책임감과 함께 왠지 그 웃음이 나에게 희망을 가져다줄 것만 같은 생각에 내 머릿속에는 무지개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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