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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셉 Jan 23. 2021

소시지를 먹을 수 없었다

[의자 놓기_04] 엄마의 마음 (feat. 줄줄이 비엔나 소시지)

   

코로나 19 때문에 미국 방문 계획이 취소된 부모님이 연말에 소포를 보내셨다. 직접 들고 오셔서 바리바리 풀어놓으며 손주들 보고 싶으셨을 텐데. 정작 물건 주인들은 못 오고 물건들만 왔다. 손자 손녀들 장난감과 옷가지, 마스크와 먹을거리를 하나 가득 채운 택배. 외국 나와 사는 자식들은 하나 같이 다 자식 노릇 못하고 사는데, 연세 지긋한 부모님들 사랑은 다함을 모른다. 두 분 마음의 무게만큼이나 상자는 무겁다. 아이들은 한껏 신이 나서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보고 엄마에게 조잘거리기 바쁘다. 국물용 볶음용 멸치며 온갖 장아찌, 볶은 깨, 참기름, 김. 언제 이런 걸 다 싸셨나. 새심 하기도 하시지. 음식이 새서 아이들 옷이나 선물에 혹 샐까 봐 꼼꼼하게도 포장을 하셨다. 그리고 상자 맨바닥에 무심한 듯 수북이 쌓여 있는 줄줄이 비엔나소시지 여섯 봉지. 꽁꽁 얼려진 채로 태평양을 건너왔다. 부모님이 한국에서 오시거나 소포를 보내실 때마다 항상 빠지지 않는 ‘줄줄이 비엔나 소시지’      


기억으로 내가 일곱 살 정도 됐던 거 같다.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으니까. 지금 흔하디 흔한 햄과 소시지 같은 가공육이 한국에 처음 나온 건 80년대 초반이었고, 보편화돼서 식탁 위에 자주 올라온 건 내가 적어도 초등학교 3학년 정도 되었던 때였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엔 누구 하나 넉넉한 살림이 없었고, 월급쟁이 아버지와 삼 남매를 둔 엄마의 주머니 사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나마 위로 네 살, 두 살 많은 누나들 도시락 반찬으로 한 번씩 밥상에 올라오던 소시지는 계란 옷을 입은 분홍 소시지였다. 물론 가끔 맛보는 분홍 소시지도 꿀맛이었지만, 엄마가 한 번씩 큰 맘먹고 사 오던 ‘비엔나 소시지’에 비길 순 없었다. 비엔나는 어딨는지 몰라도 소시지 맛으로 짐작컨대 아름답고 신비한 곳이라 생각했다. 


줄줄이 이어 붙은 소시지를 떼어내 하나하나 칼집을 두 번 넣고, 달궈진 기름에 넣는다. 참을 수 없는 냄새다. 쏜살같이 부엌으로 달려가, “엄마 소시지 하나만!” 어느새 입 안에 쏙 들어와 있다. 어묵처럼 힘없이 끊기는 챔피언 소시지 하고는 비교를 거부한다. 탱글 하게 씹히면서 가공육 특유의 향과 기름이 입 안에 퍼져나간다. 케첩에 듬뿍 찍어서 한 입 베어 물고, 밥 한 숟가락 뜨다 보면 세상에 이런 맛이 없다. 허나. 방심은 금물이다. 소시지는 나 혼자 먹는 게 아니다. 어린 나의 소박한 소원. 소시지 한번 원 없이 먹어 보는 거.      


그러나 누가 알았을까. 결국 이 줄줄이 소시지 때문에 사달이 날 것을. 주공 아파트 우리 앞집에 세네 살 배기 어린아이를 둔 젊은 부부가 이사를 왔다. 엄마는 한참 어린 아줌마를 따뜻하게 잘 챙기셨다. 지금이야 앞집 윗집 아랫집과 아파트 단지에서 왕래가 뜸하지만, 그때만 해도 다들 허물없이 지냈다. 여름에는 집집마다 대문을 열어놓고 다녔고, 없는 살림에도 서로 나누는 정이 깊을 때다. 한 여름 더위는 한 풀 꺾인 어느 날 저녁 즈음. 앞집에 엄마랑 놀러갔다가 엄마도 슬슬 저녁 준비하러 일어나는 차였다. 그때 아줌마가 갑자기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후다닥 프라이팬에 무려 비엔나소시지를 굽기 시작했다.      


“아줌마. 이거 얼른 구워서 애 밥 먹여서 보낼게요.”

“아니에요. 그러지 마. 나도 지금 가서 저녁 할 거야.”

“그래도요. 우리 애도 밥 먹일 거라서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얼른 가자. 나와.”      


나를 채근해 데려 나오는 엄마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리고 나는 절박했다.      


“엄마. 나 소시지 하나 먹고 가면 안돼?”      


엄마의 눈빛은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제발 엄마 체면 좀 지켜줄래? 좀 부족하게 살아도 다른 집에 와서 아이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소시지 하나 맘껏 먹이지 못하는 엄마는 만들지 말아 줄래?소시지 하나만 달라는 말은 나한테만 해주면 안 되겠니?’    

  

엄마의 마음을 다 헤아리기에 나는 너무 어렸고, 소시지의 유혹은 강렬했다.      


“엄마! 나 하나만 먹고 갈게. 응?”

“네. 아줌마 그렇게 하세요.”      


엄마는 끝내 신발을 구겨신고 문을 열고 나가며 최후의 배수진을 쳤다.


“너 그거 먹으면 오늘 집에 못 들어오는 줄 알아!”     

  

이쯤 되면 그만 포기했어야 했다. 그때 상황을 정리하고자 아줌마가 얼른 구워진 소시지를 한 개 집어 들고 내 입에 넣었다. 무안하게 엄마를 바라보며 입에 들어온 소시지를 씹는 순간, "쾅" 소리를 내며 우리 집 대문은 빛의 속도로 잠겨 버렸다.      


“엄마. 문 열어줘. 엄마. 아앙.”     


소시지는 입 안에서 다 삼켜지지도 않았는데 눈물부터 터져 나왔다. 하지만 닫힌 대문은 열릴 기미가 없었다. 당황하던 아줌마와 이 문이 진짜로 절대 열린 것 같지 않은 다급함. 거의 30분 넘게 아무리 대문을 두드려도 엄마는 문을 열지 않았다. 영겁의 시간이었다. 이윽고 문은 열리고, 엄마는 내 등짝을 세게 때렸다. 저녁은 고사하고, 눈이 퉁퉁 불어 울며 잠이 들었다.      


그렇게 아침이 되었다. 전날의 어색함과 알 수 없는 따뜻함이 버무려진 아침 공기였다. 그 날은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가 내 잠을 깨웠다.      


“아들 밥 먹자. 어제 저녁도 못 먹고 잤다며. 배고프겠다.”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아침상에 둘러앉아 우리 다섯 식구는 밥을 먹었다. 모든 것이 똑같은 아침이었다. 단 나보다 더 부어 있던 엄마의 눈두덩과 온갖 종류의 햄과 비엔나소시지가 밥상 중앙에 수북이 쌓여 있던 것만 빼면. 그 전날 나를 애타게 바라보던 엄마 마음을 읽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아침 밥상에 산더미처럼 올라온 소시지가 절절한 엄마의 마음이란 건 일곱 살 나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엄마는 그 밤에 언제 나가서 이 많은 소시지를 사 왔으며, 시장을 오고 가는 그 길에 혼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소시지를 원 없이 먹고 싶다는 나의 소박한 꿈이 이뤄진 그 날 아침, 나는 처음으로 소시지를 먹을 수 없었다. 그 전날보다 더 크게 울고 싶던 아침. 말없이 내 밥 위에 소시지를 올려주던 엄마.     


벌써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한국에서 보내주신 줄줄이 비엔나소시지는, 어색했던 그 날 아침 밥상으로 나를 번번이 데려간다. 손주들 먹이라고 소시지를 싸서 보내는 엄마의 마음속엔 나와 같은 기억과 애잔함이 교차하는 걸까. 아내가 저녁 식탁에 줄줄이 소시지 한 봉지를 다 구워서 올린다. 미국 마트에도 햄과 소시지는 종류별로 넘쳐나지만 익숙하고 오래된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엔 비길 것이 못된다. 귀신같은 아이들 입맛. 밥 한 공기를 다들 뚝딱 해치운다.      


“엄마 소포 잘 받았어요. 무슨 소시지를 이렇게 많이 보냈어요. 애들이 좋아하네. 잘 먹을게요.”

“아들도 많이 먹어. 소시지 좋아하잖아.”      


그 날의 기억이 우리 둘 다 비엔나소시지 마냥 줄줄이 타고 올라왔지만, 누구 하나 쉽게 말할 수는 없었다.  이 놈의 줄줄이 소시지는 마음 편하게 먹질 못한다. 왜 먹을 때마다 코끝이 이렇게 찡하고 간질간질한 걸까.





# 당신의_일상에_의자_하나_놓기

# 편히앉아서쉬다가세요

# foryourch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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