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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달 May 20. 2021

오지랖의 재해석

우리반 K군의 아침

말만 들어도 피곤한 단어들이 있다. 어쩜 그렇게 단어 한 글자, 한 글자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게도 담겼는지 그 말을 만들어 낸 조상님들이 대단할 지경이다. 오지랖도 그중 하나. 오지랖을 떠는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 오지라퍼가 생길 정도로,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바라지 않은 관심이란 일종의 폭력 같은 것임이 분명하다. 아니, 이 말이 생긴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되었으니 조상님들도 타인의 지나친 관심은 노땡큐, 사절이었던 듯싶다.


단어의 받침마저 어렵다. 아마 우리 2학년 아이들에게 오지랖 한 번 써볼래요? 하면 오지라, 오지랍, 오지람, 오지랑 등등 아주 온갖 단어가 출몰할 듯싶다. 하지만 눈으로 보고 나면 쉽게 잊히지 않는 무려 'ㅍ'받침의 단어. 강렬한 파열음이 만들어주는 이 단어는, 감히 그 모습조차 세다.



우리 반에는 내가 제발 말 좀 그만하라고 사정하고 싶은 K군이 있다. 이 아이가 급식당번을 하는 날이면 옆에서 쉼 없이 귀를 때리는 그 아이의 목소리. "너 진미채 먹을 거야? 먹어? 많이 먹어, 조금 먹어? 조금? 이거면 되겠어? 덜어줄까? 됐어? 그래." 자신을 지나가는 모든 아이들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 결국 오늘은 선생님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니, 조용히 급식을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하지만 스스로의 통제력은 그리 길지 못했다. 대충 1~2분이나 지났을까. 다시 질문 폭격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 흡사 세상의 모든 물음표를 흡수하겠다 다짐한 사람 같았다.



이런 아이들은 보통 남이 하는 모든 것에 관심이 많다. "선생님, 누구는 왜 오늘 안 온 거예요?" "선생님, 이건 뭐예요?" "선생님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선생님, 누구가 지금 손가락이 아픈가 봐요." "선생님, 누구가 지금 색연필이 없나 봐요." 정작 그 '누구'는 별 생각이 없다. 그 '누구'에게 관심이 많아 계속 관찰하는 K만 바쁠 뿐이다. '누구'씨가 색연필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떡하지? '누구'씨가 손가락이 아픈데 글씨는 쓸 수 있을까? 과연 '누구'씨도 그걸 바랬는지 의문이다. 결국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이렇다.


"들어가세요. 제발, 자리에 좀 앉아 있어."

그렇다. 그 아이는 오만 데를 참견하느라 자신의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러다 오늘, K군이 한 아이에게 건넨 한 마디가 마음이 와 콕 박혔다. 모두들 아침활동을 하느라 자신의 과제에 열중하고 있었다. 뒷문으로는 지각을 한 여자아이가 뻘쭘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매일 같이 지각을 하는 아이였으니 내 눈매가 부드러웠을 리가 없다. 좀 일찍 다니라는 신호를 삐리 삐리 보내고 있는 와중에, 오지랖 대장 K군은 자리에 앉는 그 여자아이를 보며 작게 "왔어? 안녕!" 하는 말을 속삭이는 것이 아닌가. 아아, 한 방 먹었다. 저 오지랖으로 여자아이가 학교에 오는 발걸음이 더 가벼워질 수 있다는 걸 나는 왜 몰랐을까. 그 오지랖, 누군가에게 건네는 K군의 따스한 온도였다는 걸 나는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다른 사람의 온도를 나누며 사는 존재, 인간.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품엔가 안겨 젖을 먹어야 하는 인간이란 것은 필시 타인의 심장소리에, 따스한 말 한마디에 마음을 금세 잡아먹히는 존재이리라. 그 오지랖이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미치자 내 눈에 K군은 그저 빛으로 보였다. 당신의 오지랖을 허합니다. 오늘만큼은 그대가 자리에 앉지 않아도 크게 꾸짖지 않겠다, 이리 다짐한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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