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닭보다 달걀이 먼저인 듯
최근 나의 유투브 추천 컨텐츠는 EBS 골라듄다큐로 가득하다. 아마도 극한직업 편을 통해 '자연 한알'이라는 육수 코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점차 물들어간게 아닐까 싶다.
그 외에도 나는 출퇴근을 하는 잠깐의 시간에만 핸드폰을 좀 하고 나머지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업무적이거나 개인적인 약속을 잡는 카카오톡은 '핸드폰 사용 시간'에서 제외한다면 말이다.
유투브 속 EBS 골라듄다큐를 통해 난독증에 대해 많은 컨텐츠를 접하게 되었다. 유투브로는 쪼개진 클립들이었지만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이렇다.
<다큐멘터리K 책맹인류-제1부 읽기의 과학>
<다큐멘터리K 책맹인류-제2부 초등 5학년, 왜 책이 싫어졌을까>
<다큐프라임-교육대기획 다시 학교 제10부 교과서를 읽지 못하는 아이들>
<당신의 문해력+- 까다로운 공공문서, 필요한 문해력은?>
내가 블로그에 글을 쓰던 시절에도 한번 유사한 글을 포스팅한적 있다. '어휘력과 이해의 범주'라는 제목으로 작성한 글이었는데, 당시 붉어진 몇가지 사회적인 이슈를 본 직후였다.
그것은 바로 이동진님이 영화 기생충에 대해 남긴 한줄평인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 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와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라는 어떤 기업의 입장문에 달린 몇 커뮤니티의 댓글들이었다.
그럼 최근 불거지고 있는 난독증에 가까운 분들의 원인은 무엇일까?
쓰기를 안해서 일까, 애당초 읽기를 안했던 것일까- 생각해본다.
읽기 쓰기를 나누지 않더라도, 나는 어땟나-를 돌이켜 보고자 한다.
지금 브런치 스토리에 올릴 글을 작성하고 있는걸 봐서는, 적어도 '쓰고'는 있다.
'읽기'는 어떠한가?
읽는것을 참 많이한다고 자부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난독증을 의심했던 순간도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나름 여러가지 방법을 써보기도 했다. 지금은 그래도 어느정도 궤도에는 오르지 않았나 자평하며 나의 읽기는 어땟는지 연대기순으로 복기해보고자 한다.
나는 언제부터 읽기라는 행위를 즐겼나?
지적허영심이라는 표현을 최근이 되서야 알게되었는데, 아마 중학생 시절의 내가 갖고 있던 것들이 허영심이었을것이다. 하지만 시작점을 돌아가면 더 이전으로 돌아간다.
초등학교 저학년때로 돌아간다.
당시에는 모든 집에 그랬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30권의 위인전과 수십권의 백과사전이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백과사전보다는 위인전을 달달 외우듯이 읽는 것을 즐겼었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니 집에 있는 것은 모두 10번씩은 보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위인전이 1권당 50페이지 정도밖에 안되었던것 같기도 하다.
친구네 집에 놀러가기 전까지는 우리 집 책장에 꽂혀있는 위인전이 전부인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집 책장에는 동일한 출판사에서 나온 위인전이 훨씬 많이 있었다. 약 100권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느낀 압도감이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 하긴 전세계 위인이 30명만 있는것 아니었을테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겠다.
집에 돌아온 나는 어머니께 위인전 좀 더 구해달라고 말해야할지 고민하는 초등학생이 되어있었다.
당시 집안 사정을 고려했을때 더 많은 위인전을 요구하기에는 미안하기도 했고, 펼쳐보지도 않은 수십권의 백과사전은 어쩔꺼냐는 질문에도 딱히 할말이 없어서 쭈뼛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먼저 위인전을 더 사러 가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셨다.
어머니와 함께 서울 동대문에있는 어느 헌책방에 가서 위인전을 50권은 산것 같다. 쪼그마한 초등학생이던 나는 한껏 신난 상태로 책을 20권씩 묶은 책꾸러미를 양손에 들고 갔다. 손바닥과 손가락이 빨개지도록 낑낑거리며 집에 들고갔던 모습이 생생한걸 보니 대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교 1학년때는 성경과 삼국지, 수호지에 푹 빠져있었다.
집에 있는 '한권으로 읽는 삼국지'를 주로 읽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책의 표지가 생생히 기억난다. 약 4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20번은 족히 읽었는데 볼 때마다 처음보는 것 같은 새로움에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것 뿐만 아니라 '만화로 보는 구약/신약 성경', '한권으로 읽는 수호지'도 10번씩은 읽었다. 심지어 이미 본 주제들인데도 불구하고 삼국지라는 제목만 붙어있으면 만화나 3권짜리 5권짜리 책을 잡히는대로 읽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무시무시한 중2병을 심하게 앓았다.
겉보기에는 사춘기도 없고 오글거리는 중2병도 아니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지적허영심을 채우고자하는 욕구가 가득했다. 당시 주말에는 친구들과 문화센터(지금은 도서관으로 통칭되는듯)에 가서 주말 내내 살았다. 건전한 친구들만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주말에 주로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의아하다.
당시에는 친구들 사이에서 장편소설 읽기가 유행이었다. 모든 친구들은 아니고 아주 소수의 친구들일 뿐이었지만 그것이 나를 자극했다. 각자가 시작하는 책이 달랐는데 나는 '혼불'로 정했었다. 다른 친구들은 '토지'를 읽거나 '태백산맥' 등을 읽었다. 지금의 내가 '혼불'의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걸보니 당시에 10권이라는 책을 읽어 낸다는 것이 중요했던 것 같다. 대하소설이 주는 TMI들과 50부작 대하드라마같은 구구절절함은 중학생 머리에 전혀 꽂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때 나의 지적허영심이 최고조를 찍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누가 봐도 나와 아예 관계없는 책을 도서관에서 대여했고 집에 콕 박혀서 마치 몰래 그 책을 읽곤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건 "공군의 비행교습서와 레이더망 전술 ..." 뭐 이런 내용이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봤는데, 무슨 내용인지 모르기 때문에 읽는다는 역설을 내뱉곤 했다.
내가 도서관에서 무슨 책을 빌려온지 보신 어머니께서는 '참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읽는구나'라며 칭찬(?)하 하셨던것으로 기억한다. 칭찬 맞았겟지?
고1이 되자 고등학생들의 숙원과제인 수능을 위해 언어영역에 도움이 되는 책을 골라 읽기 시작했다. 문학 Part에 나올법한 책들을 위주로 읽었는데, 마침 도서관에는 나와 같은 학생을 타겟하여 만든 책들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관악산 수재들의 문학 읽기"라던지, 과거 수능에 출제되었던 문학작품을 고등학생에 맞게 각색한 작품들이었다. 언어영역에 문학작품만이 아니라 비문학 지문도 출제되었지만 그건 문제집을 통해 해결 했다.
고1 후반부터는 좀 더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다보니 문제집도 많이 보게 되었다. 언/수/외 뿐만 아니라 사회탐구영역의 문제집에만 박혀 있다보니 정말 짧은 단문들을 많이 읽게 되었다. 그것도 어떤 득점을 위한 목적성을 강하게 가지고 말이다.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방학에 또 하나의 포인트 지점을 지나게 되었다.
당시 농구동아리를 같이하던 친구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시리즈물인 소설책을 읽는것을 봤다. '나도 책 많이 읽었고 좋아했었는데~' 라고 말하다보니, 내 마음 깊은 곳에 너무 짧은 글들만 읽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불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다가 고2때나 고3때는 더 못읽는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 친구가 책 2권을 학교에 가지고오면, 내가 그 친구의 뒤를 따라서 책을 읽었다. 10권째가 넘어가니 그 친구는 더이상 그 책을 읽지 않았다. 나는 거지근성을 십분 활용하여 주말에 그 친구네집에 놀러가서는 나혼자 친구 방에 앉아 나머지 부분을 읽었다. 거지근성이 극에 달하자 그 친구는 아예 그 책들을 통째로 나에게 대여해주었고, 나는 겨울방학 내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책을 읽었다. 공부를 하기 싫어서 딴짓을 한건 아니었던거 같은데 완전히 거지 깽깽이처럼 굽신거리며 책을 읽었다(ㄲㄲ).
그때 읽은 책은 33권짜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책으로 제목과 같은 동명의 인물에 대한 내용이었다. 임진왜란이 있던 시기 즈음,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넘어가는 권력의 이동이 있었다는것만 내 기억에 남아있다. 비록 지금의 나는 일본여행 0회에 그쳤지만, 그때의 배경지식으로 만화책 배가본드를 더욱 재밌게 읽어낸게 아닐까 싶다.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책은 진도가 잘 나가지도 않았다.
일본역사 속 다이묘는 뭔지, 자결은 왜이리 많이하는지, 사고방식은 왜이리 호전적이었다가 소심했다가 그러는지 이해는 안됬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뭐고, 조총은 언제부터 일본에 들어왔는지 이해는 안되었지만 내게는 다른 동기가 있었다. 어느때보다 긴 책을 읽는다는것에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입시를 위한 수능 공부라는 측면에서는 너무 중요했을 '고1 겨울방학때' 나는 자습실에 틀어박혀 대하소설을 완독했다. 아마도 21권에서 30권정도 까지는 내가 소설 내용을 읽고 있는건지, 그냥 눈으로 글을 따라가고있는건지 모르는 지경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고3이 되니 논술이 중요하다고 주변에서 성화였다.
논술을 준비하는 모두가 신문을 두가지 종류를 봐야한다고 하니, 아버지께 요청드려서 추가로 신문 좀 구독해달라고 말씀드렸다. 한달에 얼마 하지도 않는 (구독경제의 시발점인)신문 구독일 뿐이었는데, 내가 이것을 읽음으로써 얻는 부가가치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해야했다. 내 자식도 언젠가 본인 명의로 넷플릭스를 구독하려고 할때, 내게 그로 인한 부가가치를 설명하긴 할까?
논술을 위한 두가지 신문 구독은 다 이유가 있었다. 같은 사건에 대해 각자 다른 시선과 입장에서 쓰인 사설을 읽고 논리 연결을 연습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결국에는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지만 일단은 최선을 다해봤다. 문제집 풀이와는 달리 논술준비를 잘 하고 있는게 맞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서, 열심히 스크랩해서 파일링하고 밑줄치며 신문을 정독했다.
대학생이 되고나서는 글을 읽는 것과 담을 쌓았다고 볼 수 있겠다.
마침 모바일기기와 인터넷이 더욱 발달해서 그랬겠지만, 활자로 된 무엇인가를 읽을 일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전역 이후 자격증 준비에 본격적으로 임하게 되니, 수능 준비를 할때보다 더 짧은 단문들만 보게 되었다. 수능의 언어영역처럼 한페이지 정도 되는 문장은 전혀 없었다. 그저 간결하고 논리적으로 충분히 연결되는 수준의 지문들만 있었다. 심지어 그 짧은 단문들에도 오답자를 가려내기위해 내용이 꼬아져 있었으니, 단문 속 fake 내용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눈에 불을켜고 단문을 단속했다.
오래지 않은 수험생활을 끝내고 일을 시작하니 많은 글과 컨텐츠를 읽어내야했다. 다만 그 대상들이 소설들처럼 긴 호흡으로 내용을 설명해나가는 것이 아니었을 뿐이다. 논리적으로 연결된 법조문과 기준서들 사이에서 해석과 소통에 문제가 없도록하는 간결한 보고서만 보게 되었다. 동료 및 거래처와의 소통을 위한 이메일에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은 구구절절 내용이 담긴 엄청나게 긴 메일을 받아본적 있지만 기계적으로 읽어냈다. 어쩌다 수십페이지의 판결문을 읽어야 할 때가 왔지만, 내용이 반복되거나 강조되느라 분량이 길어진 것이지 내용 자체가 길었던 적은 없었다.
어느날 문득 학부생때 읽었던 경영잡지를 볼 일이 생겼는데, 한페이지를 넘어가는 분량을 내가 못읽겠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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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뭘 이해하지 못하는건지도 모를정도로 생경한 경험이었다. 분명 내 눈은 잡지 속 내용을 밑줄치듯 따라가고 있는데, 문단이 넘어가면 이전 문단이랑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가 안됬다. 심지어 페이지를 넘기게 되면 이전 페이지에서는 무슨 내용에서 이어졌는지 두어번은 되돌아봐야만 했다.
이럴순 없다. 읽기를 좋아했'던' 사람으로써 이렇게 난독증에 빠지는건 있을 수 없는 일!
내가 극복을 위해 시작한 방법은 단편소설을 읽는 것이었다.
5페이지 내외의 잡지속 기고문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데 바로 한권의 책을 읽기는 쉽지 않을것 같았다. 한번에 '총균쇠' 부터 시작하기에는 너무 큰 산으로 느껴졌었다. 그래서 나는 분량도 그렇고 나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글읽기는 무엇이 있을지 찾아보았다. 정처없이 걷던 교보문고 속에서 한권의 책을 발견했다. 문학동네에서 나오는 20XX년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 이었다.
일단 값이 싸고, 짧은 단편들의 연속이었다. 더 좋은건 과거의 명작들은 수십년 전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은 지금 현재의 사건 / 사고 /고민을 다룬다는 점이었다.
지금의 나는 어떻게 읽고 있을까?
글 읽기에 노출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본다.
매달 2권씩 집으로 배송되는 DBR이라는 격주간지를 기본으로 두고 있다. 그리고 회사에서 나오는 연간 독서포인트를 꼭 써야한다는 적당한 압박감으로 한달에 책 1~2권씩을 읽고 있다. 분야를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개인 취향인 경영, 경제, 심리, 역사 카테고리를 주로 선택하면서도 의식적으로 소설책을 가끔 넣기도 한다.
글 읽기를 통해 쓰여진 단어들을 수집하기도 한다.
명징하게 직조된 처연한 우화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여정을 떠나기도 하고, 심심한 위로속 심심이라는 한자는 무엇인지 찾아보기도 한다. 가끔은 한강 작가의 소설 중 채식주의자에 쓰인 '염오하다'라는 표현을 가지고 감명받은 나머지 주변인들에게 단어를 설파한다.
글 읽기를 통해 잘 쓰여진 문장의 구조가 무엇인지 배운다.
기가 막힌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진 기고문을 볼때 이마를 탁 친다. 인스타그램 속 카드섹션에 내 '서브스턴스 - 후기'보다 더 본질을 꿰뚫은 후기를 보고 한없이 부끄러워해본다. 챗GPT가 유려하게 답변해내는 구조와 화법을 보며 오히려 내가 AI를 모방하기를 마음 먹어본다.
그렇게, 아니 이렇게 글을 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