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대예보 : 호명사회 - 후기

통찰력 자체가 컨텐츠가 된다.

by 비읍비읍

송길영님의 책이 새로 나왔다.

초판이 24년 9월인걸 보니, 이번에 이 책을 집어든 나는 얼리어답터는 아닌 것 같다.


송길영님의 직전 책인 '시대예보 : 핵개인의 시대'를 매우 감명 깊게 읽었던 바 있다. 어쩜 이렇게 통찰력이 있으면서 의도하거나 전달하는 바를 명확하게 할까-라는 경외심마저 들었었다.


특히 본인의 생각을 모은 뒤, 제목을 '시대예보'로 지은 것부터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했다고 생각한다.

본 책에 설명되어 있듯이, 일기예보를 넘어 시대를 예보한다는 발상은 ,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은 트렌드리포트를 멋들어진 국어로 대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본래 책을 구매해서 읽고 나면, 주변 사람들에게 책을 추천할 겸 선물로 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매우 조심스럽게 다뤄가며 읽는데, 이번에는 감명이 깊은 부분을 두세 번 되돌아가며 읽는 것으로 부족해서 페이지 끄트머리를 조심히 접고야 말았다.




최근에 나는 업무와 관련하여 회사의 이름을 통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좀 더 드러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완전히 다른 업무를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끌고 가고, 그것들이 나를 구성하는 포트폴리오가 되길 바란다는 의미였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경제 기사면을 떠들썩하게 하고, 누구나 알 법한 시그니처 딜(Deal)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속한 대규모 조직의 이름으로 수행한 것이다. 실무라는 측면에서는 내가 온전히 녹아들어 있지만, '나'라는 이름으로 이와 같은 일을 '영업'해올 수 있느냐라고 초점을 바꾼다면 '나'는 없다.


하지만 내가 발굴해 오고, 관리하였으며, 조율하여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했다면 어떨까?

그것은 온전히 '나'라는 부분에서 의미가 생긴다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이 내가 최근 추구하는 가치와 맞닿았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이는 나만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송길영 님이 예보한 바와 같이 우리의 시대가 그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는 프롤로그를 통해 '핵개인들, 서로의 이름을 부르다'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 지으며 본문의 내용을 시작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개인은 조직의 간판과 그 안에서의 직함을 사용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짐을 깨닫게 됩니다. 'xx회사의 k실장'이 아니라 'k스튜디오의 실장 k'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자신이 곧 조직이고 조직이 곧 자신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깨달음을 주는 부분이 참 많으면서도, 가랑비에 옷이 젖듯 송길영님의 의견이 찬찬히 개진된다. 아니,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가랑비가 아니라 장맛비가 내린 것 같다. 한 200개 포인트 정도에서 이마를 탁 치며 탄복했는데 3가지만 포인트를 꼽아보자면 아래와 같다.



조직이 주는 지원과 안락함은 예전 같지 않은데 그럼에도 개인이 조직에 지불해야 하는 공동 비용이 계속 증가한다.


이 문장이 "시대예보-호명사회"를 관통하거나 핵심인 내용인건 아니다. 그렇지만 현재 사회의 구성원들이 조직을 이탈하거나 오랫동안 유지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러 이유 중에 명백한 한 가지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워라밸-워라밸-을 목소리 높여 부르짖지만 정작 원하는 복지는 '좋은 동료들과 일할 수 있는 상황'일 수 있다는 부분이다. 나를 비롯하여 정말 요즘 시대를 관통하는 말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태어난 장소를 일컫는 출신지와 함께 공부한 장소인 출신 학교로 한정되던 예전의 정체성은 너무나 제한적


나는 학부생 때 학교 로고와 전용 색상이 들어간 야구잠바를 입고 다닌 적이 있다. 그때는 선배들과 과대표(또는 동아리 대표)가 맞추라고 하니까 별생각 없이 돈을 내고 맞추었다. 그리고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했기에 나의 동선이 학교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 이 옷을 안 입고 다닐 이유 또한 별로 없었다.


그러나 최근 대학생들이 입는 과잠바에 대한 다양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대학생들이 소속감을 위해 입기 시작한 잠바에서 여러 가지로 변질된 이야기였다.


쉽게 구할 수 있게 되니 쉽게 사칭할 수 있게 되었다. 나도 과잠바만 입으면 까보기 전까지는 ㅅㅑ-대생이 될 수 있다. 소속 대학교만으로는 차별성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는지 본인들이 소속되었던 명문고등학교의 이름을 같이 넣는다. 웃픈 뇌피셜로는 소속 고등학교만으로 부족하니 소속된 고가의 아파트 이름까지 넣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다.


출신지와 출신 학교를 부각하는 것은 소속을 특정 지어 내가 밀어주고 끌어줄 사람이 누군지를 알아내기 위함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작가는 그것이 바로 본인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나도 주변사람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가장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은 지금 환경에서 만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대학생 때는 같은 대학을 온 친구들만큼 지적 수준이 일치하고 관심사가 유사하며 고양감도 비슷한 사람이 없다. 직전까지 베스트 프렌드였던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과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지기 쉽다.

취업을 하고 나니 그 좁은 문을 뚫고 들어온 동기들이 나와 가장 비슷하다. 오랜 기간 준비해서 성공적으로 문턱을 넘은 경험도 비슷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방향성도 얼추 비슷하다. 당장의 돈벌이로만 보더라도 누군가와 비교하거나/당하거나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아주 비슷하다.


좀 더 시간이 지나서 일한 지 10년 차가 된 지금은 어떤가?


같은 직장에서 시작했던 친구들과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 안 만나는 친구들이 부지기수다. 기혼과 미혼을 기점으로 갈리기도 하고 아이의 유무에 따라서도 어느새 완전히 다른 카테고리에 놓이게 된다. 돈벌이는 당장의 수입이 아니라 부모님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의 크기에 따라서도 생활수준이 달라지며, 사업적으로나 개인적인 투자로도 생활이 달라지게 되었다. 아직도 농구를 하며 각종 대회에 출전하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골프와 테니스로 전향하거나 프사오나 런닝 크루로 마음을 굳힌 사람들도 있다.


이런데도 출신지와 출신 학교로 묶이는 소속의 일원들과 나는 같은 정체성을 갖고 있는 걸까?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과 다양한 생각을 주고받으며 교류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를 제대로 설명하는 구분좌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지금 뭘 하는지, 무엇을 보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 카테고리화의 포인트라고.



선발의 몰락


고등학생 때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편해진다는 얘기를 들으며 산다.

대학생 때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아니면 전문직이라는 문턱을 넘으면 앞으로의 인생은 탄탄대로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어떤 시스템에 '선발'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좋은 곳에 '선발' 되면 앞으로의 인생이 편해진다는 인식이 파다해지니, 내가 뭐 하고 싶은지를 탐구하기보다는 '어떤 선발'을 선택해서 어떻게 넘어야 하는지의 담론만 쌓여간다. 심지어 이런 '선발'은 삶을 100세 인생이라고 볼 때 전체 여정의 20% 또는 30% 지점에서 만들어낸 성과물로 평생을 살아간다는 프레임을 이야기한다.


선발이라는 것은 정해진 파이가 있어서 선택되는 사람이 많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앞으로 나아가는 경쟁이 아니라 상호 견제하는 경쟁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경쟁은 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키며 과한 준비와 경쟁을 야기한다.

기업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에 담기 위한 수많은 스펙들이 상향 평준화 되었다. 공무원 시험에서는 난이도가 단순히 어려운 수준이 아니라 정답률 10% 미만을 만들어내는 문제가 나타났다.

의대라는 가장 좋아 보이는 선택지를 위해 고등학교 입학 이전부터 경쟁은 시작된다. 아니 중학교, 아니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까지도 메디컬 준비반으로 경쟁은 심화된다.



그렇게 수많은 경쟁을 뚫고 '선발'이 되면 앞으로의 인생은 탄탄대로라고 알려져 있었었다.

과거에는.


하지만 내가 지금 명문 대학교를 나온다고 나도 좋은 기업에 바로 취업할 수 있는 시대인가?

아니다. 백수거나 대학 졸업장이 불필요한 일을 할 수도 있다.

대기업에 취업했다고 해서 나는 돈도 많이 벌고 자아실현도 하는 단계에 이르는가?

아니다. 돈도 많이 벌지 않고 번-아웃을 느끼고 나서야 퇴사할 수도 있다.

특정 전문직이 되었다고 그 분야에서 내가 TOP-TIER로서 활동하는가?

아니다. 도태되거나 적성에 맞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어떤 선발에 들어서 조직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해서 앞으로의 인생이 편안하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달리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이 당연하다. '선발'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의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중인지가 중요할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서브스턴스(The substance) -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