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4~5년 전즈음 문학동네에서 나오는 젊은 작가상수상작품집을 통해 김초엽 작가를 알게 되었다. 해당 단편소설도 꽤 인상 깊었지만, '오랜만에 나온 SF작가'라는 표현에 내가 꽂혔던 것 같다. 이후 우연한 기회에 김초엽 작가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책을 구매해서 읽었다. 그때에도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던지라 개인 블로그에 후기도 작성해 보았는데 이제 와서 찾아보니 마지막 문구가 이러했다.
"단편을 넘어서 하나의 장편소설로 이런 공상과학 + 따뜻한 시선이 완성된다면 베르나르베르베르처럼 전 세계 시장을 뒤흔드는 작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김초엽 작가의 주식이 있다면 조금 많이 사두고 싶었다. 왠지 테슬라 초창기 주주처럼 조만간 슈퍼부자가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출처 : 내 개인 블로그, 포스팅 제목은 '공상과학 소설')
그렇게 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회사 후배가 요즘 책을 읽는데 좋은 작가가 있다고 말했다. 그의 입에서 김초엽 작가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내심 반가웠다. 이 작가의 책 2권을 읽고 싶은데 각자 한 권씩 사서 보고 돌려 읽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나는 수락했고, 이번에 읽게 된 책이 '파견자들'이다. 곧 돌려 읽기로 한 책인 '지구 끝의 온실'에 대해서도 후기를 작성하게 되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책의 표지에는 예상독자들의 관심을 끌만한 문구나, 책의 내용을 관통하는 문구가 들어가는 것 같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쓰여있다. 다 읽어 보고 나니 책의 전체 내용을 이만큼 관통하는 두줄 요약이 또 있을까 싶으면서도, 내용에 대한 스포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기가 막힌 문장 선정이라고 생각했다.
'나'라는 존재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파견자는 매료와 증오를 동시에 품고 나아가는 직업입니다. 무언가를 끔찍하게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불태워버리고 싶을 만큼 증오해야 합니다."
간단하게 줄인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파견자들'은 범람체-라는 존재에게 지구의 지상을 빼앗긴 후 지하에서 농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문화적인 환경을 바탕으로 하며, 인간이 지상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 현장파악을 하러 나가는 조사원인 '파견자'의 1인칭 시점을 내용으로 한다.(('파견자'가 인간과 범람체간의 공존을 모색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라고 하면 스포가 될 수도 있겠다.)
책의 구성은 이렇다.
분량의 1/3 부분까지는 '무슨 말을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고, 4/5 지점까지는 후룸라이드를 탄 것처럼 미끄러지듯 '이해'되고, 남은 1/5는 왜 이런 설명과 감성들이 가득한 거지...라는 T적인 사고방식으로 마무리가 되는 구성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책을 보고 느낀 핵심적인 키워드는 4가지가 있다.
1.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지명에 대한 낯섦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한국인지 외국인지 어느 나라인지 특정하기 어려운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지역명도 굉장히 다양한 문화권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게 러시아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인지 한국소설인지 헷갈릴 수 있지만, 금세 적응될 수 있을 만큼 각 캐릭터들이 특색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책 내용과는 무관할 수 있으나, 등장인물 이름이 태린, 이제프 등등인 것과 지역이름이 라부바, 베누아인 것은 초국가화된 어떤 특정 미래를 지칭하는 것인지, 이름만 지구인 행성인 평행세계 속 가상의 공산을 지칭하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혹은 글로벌한 진출을 꾀하고 있어서 언제든지 외국어로 번역되었을 때 쉬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속셈인지까지 있을지도 모른다. 유튜브도 외국인 알고리즘을 타깃으로 영어 자막을 준비하는 콘텐츠들도 많지 않던가?
2. 범람체에 대한 상상
지구의 지상을 차지해 버린 범람체를 설명하는데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파견자가 되기 위한 시험 장면이라던지, 지상의 풍경을 설명하는 장면들을 계속적으로 접하다 보니 알게 되었다. 어느 시점에는 마치 내가 직접 보거나 느낀 것처럼 그 범람체가 가지는 특성인 아름다움(지하세계와 대조해서 아름다운 것일 수도)과 부패함 끈적임 등이 완전히 이해가 되게 되었다.
죽음의 느낌일 수도 있는, 혹은 자신의 통제권을 내려놓고 무엇인가에 온전히 맡겨지는(뺴앗겨지는 것일 수도) 상황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 누구도 겪어보지 못했을 테니 상황부터가 완전히 새롭게 느껴지는 것 같다.
아포칼립스를 가정한 영화나 만화도 많이 접해봤지만, 왠지 인간이 정복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말랑함을 가진 지배자는 처음 보는 것 같아 새로웠다.
그리고 범람체와 늪인의 특성은 인간과 다른 감각기관으로 감각하고 소통한다는 점이다. 시각 청각도 효율적인 감각기관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마치 거대한 거미줄에 올라탄 수많은 사람들이 진동과 촉각 그리고 그 외의 감각들로 대화하고 소통한다는 것이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의 미스-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상상적인 해답이라고 생각했다. 시각/청각에 의존한 소통은 오해를 낳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숨기기도 하고 하지 않는가?
3. 파견자라는 건 '매료와 증오'를 동시에 품고 나아간다는 표현적인 부분
소설 속에서 범람체는 너무 아름답거나 화려하지만, 인간들이 기존에 영위하고 있는 지상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린 존재이다. 미지의 세계인 범람체가 가득해져 버린 지상을 인간에게 되찾아 오기 위해서는 철인이나 다름없는 '파견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의 미션인 '지상 찾아오기'에는 증오가 필수적이겠으나, 인간에게 범람체가 영위하는 지상(아마도 지하보다는 아름다울)과 다 같이 연결되어 살고 있는 새로운 세상은 매혹적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적절하지는 않겠으나, 지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지도층들은 파견자들에게 동양철학 상 '군자'급 능력치를 요구했던 게 아닐까 싶다. 군자는 속이지도 않지만 속지도 않아야 한다는 동양철학의 가르침처럼 말이다.
4. 범람체들은 왜 인간이 자아를 필요로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범람체들은 개별적인 존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상태로 있으며, 왜 각 개인이 개별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인간과 이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들이 범람체에게 몸을 빼앗기는, 통제권을 잃는 것을 경계하며 범람체를 몰아내려고 하는데도 평온하게 왜 개인 이어야 하지라고 반문한다. 모두 연결되어 있고 개인이지만 동시에 집단이고 초연결되어있기에 하나가 없어져도 하나가 늘어나도 집단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기에 죽음을 왜 두려워하는지 반문한다.
초개인, 나는 그룹화될 수 없는 특별한 개인이야!라고 소리치는 요즘 세상에 왜 개인 이어야 하냐는 질문은 독창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장단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은 너무 개인화되고 있는 요즘 세상에 좀 연결될 필요가 있지 않냐는 제안을 극단적인 존재로 대변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범람체들은 서로가 기억과 감정들을 공유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책의 작가와 책을 읽은 독자들 그리고 내 후기를 읽은 누군가까지도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는 일종의 범람체가 아닌지?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책의 주인공인 태린과 이제프 그리고 등장인물들, 범람체들 간의 일련의 사건을 같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책의 내용이 현실의 나와도 연결돼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의 확장을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