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가 들어선 지금, 문화예술 행정에서도 이재명식 합리성과 구조 개혁이 가능할까? 만약 어디선가 ‘제작극장’이 시범적으로 시작된다면, 오랫동안 독일식 제작극장 모델을 소개해온 사람으로서 몇 가지 핵심을 짚어보고 싶다.
흔히 독일 제작극장의 특징으로 ‘상근 예술가(앙상블)’와 ‘레퍼토리 운영’을 꼽는다. 실제로도 그렇다. 독일의 제작극장은 연출가, 배우, 무용수, 작곡가, 음악가, 작가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극장에 고용된 상근 인력으로 참여하며, 무대·조명·의상·분장 등 백스테이지 팀과 기획·마케팅·행정까지 포함한 고정 조직이 작품의 기획부터 공연까지 전 과정을 함께 만든다. 공연은 몇 회로 끝나지 않고, 매일 다른 장르의 작품을 돌려가며 올리는 레퍼토리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이로 인해 다작과 장기, 순환 공연이 가능한 구조가 독일식 제작극장의 외형적인 토대다.
하지만 단순히 상근 예술가를 고용하고 무대를 여러 번 올린다고 해서 레퍼토리가 돌아가는 건 아니다. 이 시스템의 중심에는 ‘인텐단트 체제’와 ‘시즌 큐레이션’이라는 구조적 설계가 있다. 겉으로 보이는 조직과 운영은, 사실 이 내면의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어야만 지속 가능하다.
인텐단트는 극장의 단순한 예술감독이 아니다. 그는 극장의 비전과 운영, 프로그램 구성, 인사와 예산까지 통합적으로 책임지는 극장의 CEO이자 총괄 프로듀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결정하지도 않는다. 드라마터그, 기획 프로듀서, 예술감독, 마케팅 책임자 등과 협의하며 팀 기반으로 시즌을 설계한다. 즉, 강력한 리더십과 민주적 프로세스가 공존하는 구조다. 이는 개인의 미학에 의존하는 방식이 아니라, 조직이 지속적으로 담론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힘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독일의 인텐단트 제도가 항상 이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인텐단트의 강력한 권한은 때로는 예술적 취향의 독점, 내부 견제의 부재, 조직 내 폐쇄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를 보완하려는 다양한 운영 구조가 독일 내에서도 제안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예술과 경영을 분리하는 ‘투톱 체제’(이중 책임자 구조), 혹은 인텐단트를 중심으로 드라마터그, 분야별 예술가, 기획자 등이 참여하는 공동결정이사진 기반의 팀형 협의체 운영이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리더십은 유지하되, 의사결정의 다원성과 균형을 통해 극장의 방향성과 정체성이 보다 집단적이고 민주적으로 설계되도록 한다.
또한 독일 극장은 내부 상근진만으로 작품을 만드는 폐쇄적 조직이 아니다. 매 시즌 외부 연출가, 안무가, 작곡가, 지휘자 등을 초청해 다양한 미학과 관점을 유입시키고, 내부 조직과의 균형 속에서 새로운 창작적 긴장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게스트 시스템’은 극장의 예술적 유연성을 유지하는 장치다.
시즌 큐레이션은 단순한 편성이 아니다. 그것은 극장이 매년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지역사회와 맺는 대화의 방식이다. 한 해의 시즌은 시대적 이슈와 예술적 고민을 엮어 주제별·장르별로 구성된다. “몸과 도시”, “기억과 권력”, “한국 고전과 동시대성” 같은 주제 아래 연극·무용·음악극이 병렬적으로 배치되며, 극장은 단지 공연을 보여주는 장소를 넘어 사회적 담론을 생산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한다.
이제 한국형 제작극장이 이 모델로부터 무엇을 참고해야 할지 명확해진다.
첫째, 인텐단트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하지만 독재적 1인 구조여서는 안 된다. 앞서 말했듯이, 독일에서도 인텐단트 제도의 폐쇄성과 편향성을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모델이 논의되고 있다. 한국 역시 초기 설계 단계부터 이를 염두에 두고, 인텐단트가 예술감독, 드라마터그, 기획자, 마케팅, 행정 책임자 등과 함께 공동 의사결정 구조를 이루는 팀 중심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경영과 예술을 분리하여 책임과 권한을 명확히 구분하는 투톱 체제 역시 유효한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한 사람의 취향이나 정치적 의도가 극장의 정체성을 좌우하지 않으며, 예술적 다양성도 보장된다.
둘째, 내부 앙상블의 안정성과 함께 외부 창작자 유입을 제도화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시즌의 일부를 쿼터제로 외부 공모로 선정된 연출가와 협업하는 구조로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창작 생태계는 고여 있지 않고 끊임없이 갱신된다.
셋째, 시즌 큐레이션은 연출가 개인의 시선이 아니라 극장 자체의 서사를 쌓는 방식이어야 한다. 극장이 말하는 언어, 극장이 품는 시대정신이 시즌 전체에 일관되게 흐를 때, 극장은 브랜드가 되고, 관객과의 장기적 관계도 가능해진다.
넷째, 제작극장은 시즌고용의 한계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고용의 지속성과 안정성이 낮다는 점에서 예술노동자들은 여전히 불안정한 위치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은 보장되어야 한다. 일반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극장종사자에게도 사회보장제도의 적용이 가능해야 하며, 장르별 특수성과 근무 형태를 반영한 단체협약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는 지속 가능한 창작 환경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결론적으로, 한국형 제작극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연출가 중심’에서 ‘시스템 중심, 주제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인텐단트의 존재는 필수지만, 그 권한은 반드시 팀과 시스템, 그리고 토론 구조 안에서 작동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만이 진정한 의미의 공공극장, 그리고 담론의 무대로 기능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의 측근’, ‘○○의 사람’이 극장을 좌우하는 폐쇄적 구조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는 아무리 많은 예산을 쏟아부어도, 살아 있는 예술 생태계는 결코 자라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