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시대의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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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rrtm

어쩌면 우리는 그저 성실한 인간들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입장을 고수한 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시대라는 거대한 기계 안에 저마다의 이해와 이익의 층위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말이다. 이 글은 그런 S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나의 짧은 성찰이자 사적인 사유이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모든 갈등은 언제나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인류의 역사 속에서 주제가 무엇이든, 이유가 무엇이든, 심지어 전쟁조차도 그 단순한 이유에서 시작되었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인생이라는 거대한 배를 타고 각자가 합리적이라 믿는 돛을 올린 채 항해한다. 하지만 그 돛은, 지능적으로 조직화된 사회라는 집단 속에서 언제나 더 거센 풍파를 맞이하기 마련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배를 몰며 목소리를 낸다. 누군가에게 닿기도 하고, 풍요 속의 고요함에 묻혀 침묵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자신이 정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일을 하는가? 왜 이 일을 택했는가? 왜 오늘도 이 자리에 앉아 다채로워 보이지만 결코 다양하지 않은 반복된 시간을 보내며 같은 질문을 되뇌는가?


이것은 단순한 철학적 질문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늘 어느 정도의 불만이 뒤따른다. 감내하라거나, 인정하라거나,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저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뜻이다.


한때 “총량 불변의 법칙”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나는 99%가 있기에 1%가 존재한다고 믿고 살아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믿음이 흔들리는 경험을 수도 없이 겪었다. 그때 나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히지 않으려 애썼고, 어떤 기준으로도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려 했다. 다만 늘 냉철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언제나 내게 이렇게 말한다.

“역시는 역시구나.”


그럴 때마다 단순한 낙담이 아니라 참담함이 밀려온다.

어쩌면 나는 이 사회와 조직이 굴러가는 집단지성적 메커니즘을 이해하려 애써야 하는 것일까,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지능의 차이가 아니다. 그저 각자가 살아남는 방식과 속도가 다를 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쩌면 정글과도 같다. 99%가 있기에 1%가 존재한다는 말이 통용되는 구조 말이다.


학벌로 인간의 가치를 재단하는 사회의 통념은 우리가 만들어낸 오래된 이데올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량의 법칙’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규칙을 만들고, 규정을 세우고, 경계를 나누며, 그것을 지키겠노라 다짐한다.

S시대라는 기계 속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세상에는 이미 무수한 선택지가 있었고, 그에 따른 장단점 또한 늘 존재해왔다.


우리는 노력과 희생을 통해 조금씩 세상의 무게추를 공정과 이성 쪽으로 기울일 수 있다. 불만을 표현하고, 잘못을 바로잡고,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기 위해 애쓰는 것.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모두에게 완벽할 수도 없다. 완벽한 것은 오직 증명 가능한 ‘결과’뿐이다.

타인을 깎아내리거나, 이분법적 사고로 스스로 속한 조직을 우습게 만드는 힘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다.


지금의 세상은 — 어느 한 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 이미 과포화 상태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넘쳐흐른다.

각자 자기 이야기와 스트레스에 짓눌려, 타인을 배려할 여유조차 잃어버린 시대.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 끝없이 밀려드는 일들 속에서도 묵묵히 하루를 버텨낸다. 침착하게, 성실하게, 그리고 각자가 선택한 시간 안에서. 그것 자체가 나는 늘 경이롭다.


우리는 서로에게 박수를 보내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그 하루의 소중한 시간을 불태운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너나 잘하세요.” 대신 “나나 잘할게요.”라고 말하며,

각자의 인생 항해를 조금 더 찬란하게 채워나가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