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한수 Nov 21. 2023

육시랄 놈의 역사 ‘이육사’

MBC 광복절 특선 드라마 『절정』


조국 독립 투쟁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면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의열단 ‘김원봉’을 알게 해준 영화 『암살』을 만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를 계기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아낌없이 받쳤는데도 후대에 알려지지 않은 원통한 고혼들을 찾아 함께 떠나 봅시다.  약산 ‘김원봉’은 남북 협상에 이바지하려고 북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북 정권에 의해 중국 국민당 ‘장제스’와 가까웠고 군자금도 지원받은 적이 있다는 빌미로 숙청당합니다. 북의 정권을 세운 이들 중에 중국 공산당과 함께 항일 투쟁을 한 조선의용군 출신들이 많고 그들은 ‘장제스’를 원수로 여겼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할 수도 있지만 그놈에 이념이란 게 우릴 이토록 갈라지게 만드는구나 싶은 원통함도 있습니다. 


 


그런데 ‘김원봉’과 밀양에서 앞뒷집에 살고 “형, 동생” 하며 지낸 석정 ‘윤세주’는 사람들이 더 모릅니다. 둘은 고향 친구이기도 하면서 의열단을 같이 만든 평생 동지입니다. 그런데 ‘김원봉’은 중국 충칭(중경) 임시정부 광복군에 남고 친구 ‘윤세주’는 의용대를 조직하여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결합하기 위해 옌안(연안)으로 갔습니다. 먼저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전친 사이인 둘은 이념 문제로 결별하게 되었을까요? 아니면 정치선전 활동을 군사작전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역할을 나누었을 뿐인 걸까요? 


 


‘윤세주’ 의사를 찾아가기 위해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시인 ‘이육사’를 먼저 만나 봅시다. ‘윤세주’는 ‘이육사’를 독립 투사로 이끈 선배이자 ‘이육사’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입니다. ‘이육사’의 정신사를 추적해 가면 그 처음과 끝에 ‘윤세주’가 있습니다. 곧 ‘윤세주’ 의사의 지고지순한 삶을 그린 소설이나 영화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며 ‘이육사’를 그려낸 MBC 광복절 특선 드라마 『절정』 얘기를 해 볼까 합니다. 


 


영화는 ‘이육사’가 일본 유학중 관동대학살(1923년)을 목격하고 일본 자경단에게 쫓길 때 ‘윤세주’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지고 그의 영향을 받아 일제 식민 지배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걸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육사’는 일본 유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귀국했으며, ‘윤세주’가 대구의 ‘이육사’를 찾아와 조국 독립운동에 뜻을 함께 하게 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육사’가 일본에 가서 겪은 관동대학살은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관동지방(지금의 도쿄 주변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나 15만 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더 끔찍한 것은 일본 정부가 조선인들에게 원한의 화살을 돌려 일본인의 소요를 막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때 무고하게 학살당한 조선인이 수천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조선인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거짓말을 하여 교회당에 모아놓고 몰살시키는 것을 ‘이육사’가 목격하는 장면입니다. 너무나 끔찍한 장면이라 차마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 없었을 겁니다. 실제 장면은 너무도 잔혹해서 눈 뜨고 보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재일 조선인 ‘오충공’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숨겨진 손톱자국』 이 관동대학살의 생생한 실제 장면을 많이 담고 있다고 합니다.


 


‘이육사’는 이 끔찍한 현장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육사’가 관동지진 조선인 대학살 사건을 알고 일제의 본질을 직시하게 되었다는 것을 영화는 ‘이육사’가 살육 현장을 직접 목격하는 것으로 그렸지만 이는 정확한 사실은 아닙니다. ‘이육사’가 일본으로 유학은 간 때는 관동대학살이 있고 한 해 뒤인 1924년이었습니다. 유학을 가서 그 전 해에 있었던 이 끔직한 사건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육사’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100년 전 쯤에 일어난 사건을 소설로 접한 저도 이리 원한이 사무치는데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됩니다. ‘김용필’ 선생님의 단편 소설 「관동 지진과 조선인 대학살」을 한번 읽어보세요. 소설 형식을 빌어 쓴 보고서라고 볼 수 있을 만큼 검증된 사료를 충실하게 반영했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고 원통함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육사’는 일본에서 일제의 만행을 알게 되면서 내면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유학을 그만두고 귀국한 뒤에 얼마 안 있어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1926년부터 27년까지 중국 북경의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아시아의 정세를 폭넓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 무렵 북경은 의열단의 본거지가 있었던 곳이었으니 ‘이육사’가 의열단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을 겁니다. ‘윤세주’가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으로 투옥되어 있다가 출옥한 해가 1927년이고 ‘이육사’가 중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의 범인으로 혐의를 받아 투옥된 해도 1927년입니다. ‘이육사’는 평생의 정신적 지주 ‘윤세주’를 이때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육사’가 처음 투옥되었을 때 그의 수인 번호가 264였습니다.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었지요. 진범이 ‘장진홍’으로 밝혀지고 곧 풀려나긴 하지만 그 뒤로 ‘이육사’는 불령선인으로 낙인 찍혀 걸핏하면 투옥이 됩니다. 짧은 평생에 17번이나 감옥살이를 하지요. ‘이육사’는 처음에 필명을 ‘李戮史’로 썼다고 합니다. 戮(죽일 육) 史(역사 사), ‘육시랄 놈’이라는 욕설이 있지요. ‘이놈에 육시랄 역사’라고 필명을 썼으니 ‘이육사’의 국권 상실에 대한 비통한 심정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됩니다. ‘肉瀉(설사할 사)’라는 필명을 쓴 적도 있는데 그가 얼마나 자조적이었는지도 짐작이 됩니다. 그가 국내 공작에 실패를 거듭하고 가까운 문인들이 변절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가슴 아프고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을까요. 나중에 필명을 ‘陸(땅 육)史’로 바꾸어 쓰게 됩니다. 영화에서는 부인이 戮(죽일 육)을 陸(땅 육)으로 바꾸어 주었다고 그리고 있는데 사실은 집안 어른(이영우)의 조언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육사’가 ‘윤세주’와 자주 만나 교유한 건 그가 1930년 대구 중외일보 입사하여 기자로 활동할 때라고 봐야 합니다. ‘윤세주’는 3.1만세운동 주도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아서 중국으로 피신해 ‘이회영’ 선생이 세운 ‘신흥무관학교’에서 공부하고 ‘김원봉’과 1919년 11월에 ‘의열단’을 창립하고 국내로 파견되었습니다. 1920년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로 투옥되었다가 1927년에 출옥합니다. 윤세주는 1927년 출옥하여 ‘중외일보사’에서 기자로 일한 적이 있는데 이 때 ‘이육사’가 ‘윤세주’를 만나 알게 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윤세주’는 1932년 중국 남경으로 건너가 고향 ‘밀양’ 선배인 ‘김원봉’과 함께 [조선청년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이육사’를 이 학교에 가입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이육사’는 1933년에 간부학교를 졸업하고 6월에 국내로 침투하면서 상해에서 중국 대문호 ‘루쉰’을 만나고 동지들과도 최후의 만찬을 나누면서 그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증표를 바칩니다. 그가 증표를 바친 이가 바로 ‘윤세주’입니다. 그만큼 ‘윤세주’는 사상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이육사’의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이육사’는 1941년도 발행된 조광(朝光) 1월호의 연인기(戀印記)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떤 사람에게 그 어떤 증표 하나라도 절실히 남기고는 싶으나 목숨 이외에 예의에 어그러지지 않게 건넬 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나는 분신처럼 아끼며 수중에 간직해 오던 비취인장(翡翠印章) 한면에 “贈S.1933.9.10.陸史”라고 새겨 S에게 건넸다.” 필자 주) ‘S’는 ‘석정 윤세주’


 


그는 간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공작 임무를 맡고 1934년 7월에 서울로 들어옵니다. 비밀 작전을 수행하면서 여러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 한 예가 동지 ‘노윤희’의 변절로 ‘이육사’가 체포되고 만 사건입니다. 뼈아픈 배신을 겪은 것이지요. 극에서 그리고 있는 ‘노윤희’는 실존인물 ‘최정희’입니다. 처남의 변절로 구속되고 구속 중 생후 2년 된 아들의 죽음(실제로는 3년 전에 죽음)까지 겪어야 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이육사’는 심적으로 너무 나약해집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폐해진 ‘이육사’는 가족들과 떨어져 살면서 주로 집필활동을 하게 됩니다. 건강 상태가 나빠지고 조직에서는 나약한 감상주의자라 공작 일을 맡길 수 없다고 하자 좌절하여 병원을 전전하게 됩니다. 1938년 서울로 이사 간 뒤로는 주로 시 창작에 몰두하고 이 때 대표작들이 대부분 나옵니다. 그의 대표작 <절정>과 <청포도>도 이때 나온 작품입니다. 그는 자신이 나약한 지식인에 불과하다는 좌절감에 빠지고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지내게 됩니다. 이때 ‘서진섭’ 등 문인들과 어울려 지내지만 그들의 친일 행위에 ‘이육사’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고 배신자 ‘노윤희’, ‘서진섭’은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면 다니는 친일 매국노가 됩니다.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서진섭’이 바로 실존 인물 ‘서정주’라고 합니다. 실제로 ‘이육사’는 ‘서정주’, ‘신석초’ 등과 1937년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미당 서정주’의 매국 행각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신석초’ 또한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회원이었다가 변절한 사람입니다. 암살단으로 활동하기에는 너무 심약하다 하여 밀려나고 같이 어울리던 문인들은 다들 매국노로 변절해 버리니 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내가 실의에 빠진 ‘이육사’를 돌보아 주면서 건강을 되찾고 부부의 정이 돈독해지는 듯한데 ‘태항산’ 전투 소식을 접합니다. ‘이육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투사들의 소식을 듣고 그대로 평안히 지낼 수가 없어 다시 중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중국으로 가 ‘조선의용대’ 지휘관이 된 ‘윤세주’를 만나 그와 함께 전투에 참여하고 그의 죽음을 눈 앞에서 직접 목격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영화에서는 ‘이육사’가 그토록 존경하던 ‘윤세주’와 그 유명한 ‘태항산’ 전투에 동참하여 ‘이육사’의 항일 의지가 너무나 감동적으로 실현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사실은 ‘윤세주’가 죽고 난 뒤인 1943년에 ‘이육사’는 중국으로 넘어가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중경)’을 거쳐 중국 공산당 팔로군의 본거지 ‘옌안(연안)’으로 갔고 그가 가장 존경하고 따랐던 윤세주의 거룩한 죽음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다시 무장투쟁에 복무하기로 마음을 다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조선으로 무기를 반입하려다 체포되어 북경으로 이송되고 거기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육사’가 이토록 따르려 했던 석정 ‘윤세주’는 어떤 분일까요.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그가 중국에서는 항일 영웅으로 떠받들어 모셔지고 있다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연변의 조선족 문인들에게 물어보니 그는 시골 촌로도 다 아는 너무 잘 알려진 민족의 영웅이었습니다. ‘이육사’의 삶을 좆다가 석정 ‘윤세주’를 알게 되고 그 삶을 뒤좇아 가보니 우리의 뒤틀린 역사가 너무너무 원통합니다. 이놈에 육시랄 역사…….


 




작가의 이전글 서러운 학생의 날 – 1929년 11월 3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