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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달러 스테이크의 추억

굽기는 미디엄으로

by 유영해

치마가 바람에 뒤집힐 듯 캉캉 춤을 췄다. 밀짚모자와 치마를 동시에 누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선착장 건너편으로 케언스와 섬을 오가는 페리의 선두가 나타났다. 드디어 오는구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번졌다. 돌풍에 치마가 위로 솟구쳤다. 나는 ‘꺅’ 소리를 내며 옷을 붙들었다.


남편은 언제나처럼 하선과 동시에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이름도 푸르른 그린 아일랜드는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에 존재하는 유일한 산호초 섬이었다. 10개월을 기다린 재회는 설레면서도 상쾌했다. 헤어졌던 시간만큼 팔을 벌렸다. 부부의 만남은 포옹으로 시작됐다.


“에구,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

'이 놈이.'


재회의 감동이 썰물에 쓸려갔다.

호주의 햇볕과 스트레스로 얼굴 여기저기 뾰루지가 돋았다. 두드린 파우더가 궁색해서 썩은 표정으로 욕을 대신했다. 입으로 뱉기에는 찰랑이는 잔물결이 눈부셨다. 방식은 잘못됐지만, 걱정하는 마음에 건넨 인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남편 손을 이끌고 리조트에 도착했다.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룸서비스로만 힐끗거리던 숙소였다. 푹신한 침대와 넓은 욕조, 천장의 팬까지. 나무로 만들어진 골조가 친환경적이었다. 주인님 방에 몰래 침입한 도비의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캐리어를 옮겨준 동료 직원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했다. 좋은 시간 보내!


호주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부족한 영어 실력에 곤란한 일도 많이 겪었다. 남편한테 말하고 위로를 받아도 좋았을 텐데, 우리는 그간의 일을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지나간 날은 묻어두고 현재를 즐기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여기서 일해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총지배인이 준비해 준 샴페인은 은은한 단맛이 일품이었다. 서빙하면서 침만 삼켰던 호주산 바닷가재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석양빛 불꽃이 어둠을 밝혔다. 하얗게 다림질한 테이블보와 반짝이는 식기는 원래라면 내가 깔고 준비하는 물건이었다. 처지가 바뀌자, 마음 한편이 간질간질했다. 내가 정말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거겠지.


“다들 호의적이네. 네가 무척 일을 잘했나 봐.”


남편은 시종일관 기분이 좋았다. 한 사람분의 일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넘어온 풍랑을 그는 알지 못했다. 눈물을 삼키며 버틴 날들이었다. 모자란 과거를 숨길 수 있어서 안심했다. 떨어진 연인의 장점이었다. 그저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남편도 선상에서의 생활에 입을 다무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묵묵히 차려진 성찬을 삼켰다.


다음날, 섬을 떠나 본격적인 호주 여행을 시작했다. 기한은 한 달, 두 명의 백수가 즐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배 타는 사람의 최대 장점은 평일이든 주말이든 가리지 않고 푹 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재취직도 쉬운 편이라 일자리 걱정은 없었다.


소비를 참고 모은 예금은 충분했다. 앞날에 대한 걱정은 던져버렸다. 북부에서 남부로 내려가는 여행 계획을 세웠다. 차가운 철판과 좁은 숙소에서 벗어난 우리는 하얀색 돛을 펼쳤다. 둘이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구쳤다.


나무에 매달린 코알라가 느릿느릿 움직이고, 숙련된 농장지기가 두꺼운 양털을 밀어냈다.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사진을 찍고,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나온 그래비티 앞에서도 포즈를 취했다. 시원한 바람에 하늘과 바다는 부드럽게 이어졌다. 그 여유가 우리를 다시 사람답게 만들었다.


골드코스트의 끝이 없는 해안선은 해운대의 몇 배를 자랑했다. 바다 위가 아닌 바다 옆을 거니는 발걸음이 한결 여유로웠다.


“기관실에서 일하면 햇빛은 거의 안 보지 않아?”

“갑판에서 일할 때도 많아. 용접도 하고 다른 일도 도와주고 하니까.”


그을린 얼굴에서 지난날의 고생을 짐작했다. 남편은 케미컬선의 2기관사로 근무하고 돌아왔다. 위로는 상사의 눈치를 보고 아래로는 후임을 지도했다. 배를 타고 태평양 한복판을 지나가면 하늘에 뜬 은하수가 장관이랬다. 수천억 개의 별이 만든 흐름은 파도의 방해 없이 바다와 맞닿았다.


“그것도 계속 보면 감흥 없어.”


추억에 잠긴 듯 쓸쓸한 미소였다.

그린 아일랜드에서 올려다본 밤하늘 또한 수많은 별로 반짝였다. 괴롭고 힘들수록 위로가 되기는커녕, 모니터 속 화면처럼 딱딱해 보였다. 우주 같던 하늘도, 부서지는 물거품도 따라가면 남편과 이어져 있었을 텐데.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리운 이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래서 견뎌온 시간만큼이나 좋은 추억을 남기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호주는 남편이 좋아할 만한 나라였다. 무엇보다 고깃가 저렴했다. 원래부터 마트 탐방을 즐기던 그는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신이 났다. 요리가 가능한 숙소에서는 생고기를 사 와 마음껏 구워 먹었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마다 참새가 방앗간을 들르듯 유명 스테이크 집을 찾아갔다.


제집처럼 들렀던 음식점은 시드니에 있었다. 요리는 심플했다. 잘 구워진 커다란 고깃덩어리 옆에 으깬 감자 한 줌이 다였다. 그 단순한 음식을 썰어 먹는 남편의 두 볼이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이걸로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야 날마다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접시의 스테이크를 뚝 잘라 옆 접시로 옮겨주었다. 많이 먹고 쑥쑥 자라야지. 오랜 시간 같은 메뉴로 버텼을 그의 위장을 단돈 8달러가 위로해줬다.


숙소는 어딜 가든 비쌌다. 호텔 대신 백 패커스를 자주 이용했다. 간혹 머무는 곳마다 다국적 파티가 벌어졌다. 일본이나 필리핀에서만큼은 몸을 사리지 않았다. 적당히 이야기하고 술을 마시며 그 자리를 즐겼다. 한 일본인 여행객 한 명이 자국어로 남편에게 물었다.


“영어랑 일본어, 어느 쪽이 더 쉬워?”

“일본어가 좀 더 싸.”

“싸다(=야스이)가 아니라 하기 편하다(=시야스이)라고 해야 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남편은 황급히 말을 수정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두고두고 곱씹다가 술만 먹으면 툴툴댔다. 다른 사람 앞에서 어쩜 그럴 수가 있냐고. 보통 섬세한 기억은 내 담당이었으므로 어지간히 민망했나 싶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얘기만 나오면 고개 숙여 사과한다. 희미한 추억도 앙금으로 남으면 오랜 상처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같은 맥락으로 일본과 세부에서 외로웠던 시간을 들먹이면 남편은 바로 무릎을 꿇는다. 그때는 자신이 철이 없었노라고, 젊어서 그랬노라고.


호주에서는 그런 다툼 한번 없이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어찌 보면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신혼여행이었다. 남겨놓은 사진을 지금도 가끔 함께 본다. 선글라스를 끼고 브이를 만든 손가락에 거짓은 없었다. 추억은 남겨야 빛을 발한다. 호주의 굽기는 미디엄이었다. 설익거나 타지 않은 적당한 관계의 맛을 우리는 오래도록 씹고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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