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
끝나지 않는 방학이 찾아왔다.
그 봄은 들풀조차 조용히 꽃을 피웠다. 학생들은 집 안에서 신학기를 맞이했고, 가게도 거리도 오가는 사람 없이 을씨년스러웠다. 겨울의 연장선에 아이와 나는 집에 틀어박혔다. 베란다로 보이는 놀이터에는 모래 삽과 장난감 자동차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걸 도화지 삼아 다섯 살배기 손은 베란다 창문에 그림을 그렸다. 삽화처럼 그려진 일곱 빛깔 무지개가 샤워기 물줄기에 덧없이 지워졌다.
"엄마, 이거 봐요."
"물감이 번지네. 신기하지?"
SNS의 맛을 알게 된 건 이때부터였다. 인스타그램에는 아이가 좋아할 만한 집 놀이가 가득했다. 유명한 사람을 몇 명 팔로우했더니 쉴 틈 없이 정보가 몰아쳤다. 우유 마블링, 풍선으로 도장 찍기, 키친타월에 스포이트로 물감 떨어뜨리기, 밀가루 놀이 등등. 엄마가 준비해 주는 모든 놀이를 아이는 두 손 치며 좋아했다. 바깥 눈치를 보고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휙 놀다 휙 돌아오기도 했다. 서늘한 바깥 상황에 비해 집은 평온했다. 어린이집에 안 가는 아이로서는 오히려 천국 같은 날들이었다.
남편은 코로나가 오기 직전에 여객선으로 배를 옮겼다. 모든 나라가 수교 거부 정책을 펼치자, 여객선은 상선 역할만 했다. 2주에 걸쳐 외국에 다녀오면 배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아도 자가격리 대상이 됐다. 3주에 한 번 보는 만남이 2주에 한 번으로 늘었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면 아들과 마주 보고 만세를 불렀다. 소파에 누워있는 아빠 배를 두드리며 아기 상어 노래를 불렀다.
바이러스는 산불처럼 번졌다. 걸린 사람의 동선이 낱낱이 파헤쳐지고 연일 뉴스에 오르내렸다. 남편이 타던 배는 상선의 기능마저 하기 힘들어졌다. 결국 회사는 선원들에게 유급휴가를 권고했다. 남편은 그렇게 몇 달의 휴가를 얻었다. 타당한 이유가 있는 쉼이었기에 우리는 마냥 신이 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상이 돌아오기 전에 얻은 잠깐의 휴식인 줄로만 알았다.
줄어드는 손님으로 호텔 여기저기서 프로모션을 열었다.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 중 하나인 파라다이스 호텔도 마찬가지였다. 오션뷰를 자랑하는 객실이 저렴한 가격으로 풀린 걸 발견하고 남편이 말을 걸었다.
“영해야, 이거 봐봐.”
“우와, 가격 좋다.”
“갈까?”
“가자.”
캐리어에 짐을 챙기는 손놀림이 가벼웠다. 계속 집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시던 차였다. 마스크가 법적으로 의무화되기 전이었다. 그럼에도 미리 사놓은 마스크를 주섬주섬 챙겨서 가방에 넣었다. 아이의 래시가드를 접다가 ‘수영할 때는 어떻게 하지.’란 걱정이 스쳤다. 물에 젖는 순간 마스크는 쓸모를 다할 터였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떠오른 생각을 뿌리쳤다.
‘설마 우리 가족이 코로나에 걸리겠어.’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과신했다.
해운대 앞바다는 여전히 푸르렀다. 넓은 백사장과 계단을 만드는 파도가 아름다웠다. 시원한 파도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렸다. 관광객으로 붐볐을 해수욕장이 텅 비어 있어서였다. 아이의 작은 발이 모래사장에 폭폭 가라앉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자연의 경이로움에 아들은 크게 웃었다. 앞에서 다가오는 사람이 보이면 화들짝 놀라 마스크를 씌웠다. 모두가 조금씩 거리를 두고 서로를 스쳐 지났다.
호텔 수영장은 근사했다. 해운대가 한눈에 보이는 온수 풀은 따뜻했고, 소금기 어린 공기는 시원했다. 수영장까지 마스크를 들고 갔지만 역시나 무용지물이었다. 우리는 밀집된 곳을 피해 바깥에서만 수영을 즐겼다. 아이는 생수병뚜껑과 물안경 하나로 잠수사가 되었다. 물에서 나온 두 볼이 촉촉했다. 대리석 타일에 올려놓은 마스크가 바람에 움찔거렸다. 무거워진 손을 들어 내리누르자, 힘 없이 납작해졌다.
저녁과 아침 뷔페는 훌륭했다. 그만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허전했다. 한 번 여행을 즐기고 나니 다른 곳으로 놀러 가고 싶은 마음이 불길처럼 솟았다. 어디 갈 곳 없나, 다음 목적지를 탐색하던 어느 날 전화가 걸려 왔다. 머문 지 얼마 안 된 호텔로부터의 연락이었다.
“확진자로 밝혀진 고객님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신 게 확인되어 연락드렸습니다.”
“네? 정확한가요?”
“네, CCTV를 확인한 결과, 자제분은 마스크를 했는데 안타깝게도 부모님은 마스크를 안 쓰셨네요.”
연신 죄송스러운 지배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발밑부터 심장까지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수영장을 제외하고 꼭꼭 챙기던 마스크를 잊은 순간은 그때뿐이었다. 조식을 먹으러 로비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어른 마스크를 챙기지 않은 걸 깨닫고 객실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밥을 먹을 때 어차피 벗어야 하는데, 뭘.’이라는 생각에 그대로 올라탄 엘리베이터였다.
선명히 떠오르는 기억에 절망이 한층 짙어졌다. 왜 하필이면 그 엘리베이터를 탔을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확진자를 원망하고 마스크를 챙기지 않은 나와 남편을 원망했다. 그나마 아이가 마스크를 했다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천만다행으로 호텔에서 다녀온 후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우리가 코로나에 걸리는 것도 무서웠지만, 누군가에게 이 병을 옮겼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건 정말이지 오싹한 일이었다.
전 국민이 실의에 빠져 조심하고 있는데 그놈의 호텔이 뭐라고. 경솔한 행동을 뼛속 깊이 반성했다. 1박 2일의 자유는 14일간의 고립으로 대가를 치렀다. 다행히 코로나는 우리를 피해 갔다. 갑갑하게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으며 한참 동안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 가족이 누렸던 특별한 행복은 코로나를 벗어나는 데까지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여행의 방향을 바꾸었다. 때마침 친구가 욕지도에서 펜션을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만의 작은 일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 다시 한번 주섬주섬 짐을 꾸렸다.
코로나로 타격을 입은 사람도 많았지만, 마스크 사업을 운용한 사람처럼 혜택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혼자서 즐기는 취미인 낚시를 하러 이전보다 많은 사람이 욕지도를 찾았다. 우리는 2층 펜션의 방 한 칸을 아지트로 삼고 짐을 풀었다. 전면 창유리에는 통영의 푸른 바다가 두꺼운 유화처럼 펼쳐졌다. 찾아오는 들고양이와 놀고, 바닷가 자갈길을 산책하며 지루하고도 평안한 날을 보냈다. 저녁이면 한가득 공수해 온 고기와 술을 꺼내 이야기판을 벌렸다. 다른 지방에 사는 친구가 놀러 오면서 안주는 더 다양해졌다. 아이를 일찍 재우고 나면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들이 술잔을 채웠다.
금방 지나갈 줄 알았던 코로나는 무려 3년이 넘도록 이 세계에 머물렀다. 남편이 복직하고도 사태는 악화를 반복하다 조금씩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멈춘 시계만큼 우리 가족은 함께할 수 있었다. 해가 질 녘 바닷가처럼 황홀한 순간이었다. 그 행복이 누군가의 불행 위에 있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환호로 벌어진 입술을 다물었다.
긴 밤을 지나고 마침내 아침 해가 떠올랐다. 마스크를 벗어 던진 모두의 바람이었다. 저녁노을은 찰나라서 아름다웠다. 다시,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