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집 똑순이

by 꿈꾸는 해바라기

우리 집은 광업소 초입의 점방집이었다. 아버지가 먼저 들어가 집을 마련했고, 엄마는 집이 완공될 무렵 두문동 고개를 넘어 아버지를 찾아왔다.


엄마는 나를 등에 업고, 두 살 터울의 오빠 손을 꼭 잡고 동네 대문을 하나씩 두드리며 아버지가 있던 은자네 집을 찾았다. 해가 기울 무렵 은자네 집을 찾았고, 은자 엄마는 등에 업힌 나와 동생을 가져 불룩한 엄마의 배를 번갈아 보며 문을 열어주었다. 별다른 세간도 없이 '은자 엄마'라 적힌 쪽지 하나와 아이 셋을 데리고 광산촌으로 남편을 찾아온 젊은 새댁의 형편을 짐작했을 것이다. 은자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 아이였고 엄마는 필요할 때면 은자네에서 옷가지와 세간을 빌려 쓰곤 했다. 가난과 생존이 마치 한 식구처럼 덜컹거리며 비탈길을 오르던 시절이었다.


과자·통조림·음료·소주 등을 방에 딸린 홀에 진열해 팔기 시작하면서 우리 집은 '점방집'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마을에서 처음으로 텔레비전이 들어왔다. 네 다리에 양쪽으로 문이 달린 흑백텔레비전이었다. 당시 "에루야 에루야 에에~에~~루야"라는 노래로 시작하는 드라마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로 저녁마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말 그대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미리 와서 서로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도 치열했다. 나는 꾀를 내어 온 순서대로 줄을 세우고 차례대로 입장시켰다. 엄마와 친한 이웃은 공짜였지만, 다리 건너 사택 사람들이나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꼬박꼬박 10원씩 받았다. 나의 룰이 있었고, 그 룰을 꽤나 엄격하게 지켰다. 이때부터 우리 집은 '점방집'에서 '텔레비집'으로, 나는 '점방집 딸내미'에서 '텔레비집 똑순이'로 불렸다.


흑백 드라마 속 주인공의 대사와 몸짓에 맞춰 탄성과 욕설, 눈물과 웃음을 쏟아내던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야 우리는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먼저 드시기 전에는 누구도 밥을 먼저 먹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안 계셨던 그날, 나는 드라마가 시작하자마자 엄마에게 밥을 달라고 보챘다.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라는 엄마 몰래 밥을 먹을 생각으로 나는 밥이 있는 부뚜막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러나 예닐곱 살 아이의 팔 길이는 밥까지 닿지 않았고, 나는 결국 부뚜막 위로 올라가 밥을 가져오기로 했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드라마에 빠진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높아졌다고 생각 들었을 때, 첫 발을 내디뎠다. 잠시 기다렸다가 다음 발을 내딛는 순간, 미끄덩 빠지는 느낌이 들더니 이내 뜨거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연탄불이 활활 타는 아궁이 속으로 그대로 빠져버린 것이다.


드라마가 끝나고 우리 집 부엌을 통해 집으로 돌아가던 뒷집 아줌마가 나를 발견했다고, 엄마는 소주 두 병을 내 엉덩이에 붓고, 시내 병원으로 나를 업고 달려갔다고 나중에 들었다. 드라마가 끝나도록 나의 몸은 아궁이에 주저앉아 불타고 있었지만, 나의 울음과 비명은 사람들의 소리에 묻혀 아무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엄마는 그런 중에도 아버지의 저녁 상을 차려 내왔다. 나는 앉지도 못하고 엎드린 채로 숟가락을 들었다. 그 순간, 밥상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밥과 반찬이 방 여기저기로 쏟아졌고, 그릇과 밥상은 거꾸로 뒤집힌 채 쿵 떨어져 뒹굴었다. 어린 나는, 아버지 몰래 먼저 밥을 먹으려 했던 내게 화를 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배고픔도, 통증도 묻고 조용히 잠을 자야만 했다.


의사는 흉터가 크게 남을 거라고, 등과 엉덩이가 흉터 때문에 서로 붙어서 키 성장이 멈출 거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자랐다. 큰 키는 아니어도 평균 그 나이대만큼은 자랐다. 내 몸은 흉터와 함께 자랐고, 아버지에 대한 허기는 점점 깊어졌다.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는 삼 남매 중에 사막에서 살아 돌아 올 아이는 나뿐일 거라고, 점방을 할 때 어린아이가 계산도 빠르고 정확해서 물건도 잘 팔았고, 외상값도 척척 받아왔던 똑 부러짐과 고집을 믿는다고, 곧 시집갈 나에게 말씀하셨다. 늘 무섭고, 공포스러웠던 아버지였다. 그냥 아버지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더 간절했던 때였으므로 건성으로 대충 대답하고 아버지와 마주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내게 아버지는 늘 그림자조차도 두려운 공포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채워지지 않던 허기였다. 차갑고 단단한 벽이었다. 그러나 엄마와 함께 가을 단풍 아래를 걷는 올해 여든여섯의 아버지, 그 긴 그림자가 요즘엔 쓸쓸해 보인다. 혈혈단신으로 광산촌에 들어와 철도 공사장 근처에서 함박집을 하다가 점방을 열고 술과 잡화를 팔아 그날그날 벌어 식구들의 밥을 마련하던 가난한 가장이었다. 뿌리내릴 곳 없는 타지, 검은 탄가루 속에서 하루를 여는 일만으로도 버거웠을 고독한 가장이었다.


나는 흉터와 함께 자랐고, 아버지를 향한 허기도 점점 커져갔다. 내 딸아이가 결혼할 나이가 되어서야 마른 껍질만 남은 아버지의 굽은 등이 거친 겨울을 버텨낸 단단한 버팀목이었음을, 술에 기대어 터뜨리던 가부장적 폭언과 폭행 역시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한 서툴고 허름한 생존 방식이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미움이 너무 커서 미처 읽지 못했던 아버지의 온기가, 화상을 입었던 그날 이후 날마다 거즈를 갈아주고 약을 발라주던 그 숨은 따스함이 내 키를 자라게 했음을 이제야 느끼게 되었다. 오래도록 읽지 못했던 아버지의 숨은 온기가 나를 버티게 하고, 결국 봄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 주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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