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거울을 보기가 망설여진다.
눈 흰자 반이 붉게 번졌다.
예전엔 하루이틀이면 가라앉던 실핏줄이
이젠 며칠씩 남는다.
몸이 먼저 피로를 말하는 나이가 된 걸까.
지인들은 말한다.
“또 터진 거야?”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병원은 가봤어?”
그 말들이 다 걱정이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더 피곤해진다.
고맙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론 조용히 거리를 둔다.
관심이 싫은 게 아니라,
그 관심이 내 마음의 문을 억지로 두드리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가까운 동료나 가족이 묻는 건 괜찮다.
그들은 내 일상을 알고,
나의 습관과 피로의 리듬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들의 말엔 불필요한 시선이 없다.
그냥 “괜찮아?” 한마디면 충분하다.
그 말이 위로처럼 스며든다.
하지만 겉으로만 친숙한 사람들의 말은 다르다.
“요즘도 글 써?”
“그 나이에 아직 그렇게 해?”
“또 터졌네, 쉬어야겠다.”
그런 말은 걱정의 옷을 입은 평가처럼 느껴진다.
내향인은 그 온도의 차이를 정확히 알아챈다.
말의 내용보다 말이 건네지는 기류에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라서.
그래서 그 순간 마음이 살짝 닫힌다.
이번주는 외출이 잦지 않다.
누군가 마주쳐서 내 눈을 보고,
괜히 묻는 그 순간이 두렵다.
그 대답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이미 마음이 지친다.
내향인에게는 이런 일상의 대화조차
감정의 체력을 쓰는 일이다.
나는 그저 조용히 있고 싶을 뿐이다.
내 표정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괜히 웃지 않아도 되는 공간 속에서
비로소 숨이 고르게 쉬어진다.
내향인에게 고요는 외로움이 아니라 안정의 온도다.
아무도 묻지 않는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다시 나를 다독인다.
걱정이 고맙지 않은 게 아니다.
다만, 지금의 나는 걱정보다 이해가 필요하다.
“괜찮아질 거야.”보다
“지금 그대로 괜찮아.”라는 말이 듣고 싶다.
나를 고치려는 위로보다,
그저 옆에 머물러주는 침묵이 더 위로가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집에 머문다.
잔뜩흐린 하늘로 비가 내렸다 멈췄다가 반복이다.
조용히 커피 한 잔을 내린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진 않았지만,
마음은 조금 덜 붉다.
외향적인 내향인의 법칙 하나.
모두가 걱정으로 다가올 때,
나는 고요 속으로 물러난다.
이해받지 않아도 괜찮지만,
억지로 웃지는 않겠다.
걱정보다 이해가 필요한 날,
나는 그렇게 조용히 나를 다독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