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 세시 칼리 Oct 07. 2023

어차피 정리될 관계라면.

인연이란 것이 참...

 마흔 넘게 살아오면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는 아이의 학교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 친구로 지내며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온 친구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H다. 인천에서 여고를 다닌 우리는 짝이 되면서 친해졌다. 2교시 끝나고 점심 도시락을 까먹고, 점심시간에는 학교 매점에서 빵을 사 먹거나, 간단한 분식을 사 먹기도 했다.


고3 수험생이라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고, 우리는서로에게 의지하고, 격려하며 고3 힘겨운 시절을 함께 보냈다. 중간, 기말고사 기간에는 휴일에도 함께 만나 공부하기도 하고, 여름방학에는 가고 싶은 대학에 미리 함께 가보며 대학 입학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그렇다고 공부만 했던 건 아니다. 함께 소소한 일탈을 하며 우리 둘만의 추억을 쌓기도 했다. 야간자율학습에 선생님께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함께 빠져나와 월미도에 가기도 했다. 월미도를 걸으며 미래에 대해, 모의고사 성적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커피 자판기에서 뽑은 믹스 커피는 왜 그리도 달달하고 맛있었던지. 그렇게 우리는 앞날을 계획했다. 추억을 만들었다.


친구는 늘 밝고 명랑했다. 그 성격은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고 난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그런 밝은 에너지가 나에게도 흘러온다. 우리는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전화 통화를 하거나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여전히 여고생 마인드로 깔깔거리며 대화하기도 한다. 어리고 순수하던 19살에 만난 친구.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설레고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이렇게 20년이 넘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인연이 있는 반면, 내가 가지지 못했던 면을 가진 이에게 끌려 함께 단기간, 때론 장기간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결국은 나와 맞지 않은 성향 때문에 연락을 끊은 적도 있다.

살면서 정확히 딱 2번.

처음엔 처음이니까 이렇게 연락을 끊을 수도 있구나, 내가 상대방에게 많이 지쳐있었구나 생각하며 잊으려 했고, 그 후로 그런 경우를 또 겪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과 사람사이는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부모 자식, 부부, 형제간에도 인연을 끊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니, 남남인 관계는 오죽하랴.

가족처럼 지냈다고 생각했던 인연도 한순간 돌아서니 아무 사이도 아닌 관계가 된다.


그 후로 나에 대해서도 조금은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는 어떤 성향의 사람과 맞는지, 어떤 성향의 사람과는 맞지 않는지에 대해서.

결국은 나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과의 인연이 오래 지속된다. 나와 다른 사람이 좋아 만났는데, 나와 달라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처음에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호불호가 명확한 사람에게 끌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맞지 않다는 걸 희미하게 알게 된다. 그걸 인식하면서도 애써 외면하며, 버티는 시간이 꽤 길었다. 10년 이상의아주 오랜 기간을.

하지만 그 희미했던 인식들이 점점 더 또렷한 색으로 덧칠해져, 더 이상은 오점을 감추지 못하게 될 때쯤 나와 맞지 않다는 걸 너무나도 확실히 알게 되는 순간, 관계가 정리되었다.

그건 마치 살짝 냄새가 올라오는 쓰레기 봉지를 꽉 채우지 않아서 버리기 아깝다는 이유로 며칠만 더 채우고 버리자, 며칠만, 며칠만 생각하다 더 이상 참지 못할 악취가 올라오면 그제야 어쩔 수 없이 버리게 되는 상황과 비슷하다.


냉장고 안의 이미 노리끼리하게 변색된 콩나물을 보며, 내일은 해 먹어야지, 해 먹어야지 하다 또 며칠이 지나고, 이제는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꽤나 눈에 거슬려 콩나물이 있는 자리는 쳐다보지 않으려 시선을 피하다가 더 이상 음식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콩나물을  보게 되어버렸을 때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과 비슷하다.


지금껏 만나온 시간과 나와 그 사람과의 좋았던 기억들, 추억들을 그냥 버리긴 아까워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조금씩 미루다 보니 결국엔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될 날까지 기다리다 끝나버렸다.

그렇게 또 알아간다. 나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인생에 대해서.

나는 강한 성격, 직설적인 말을 내뱉는 성격,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난 한번 마음이 닫히면 쉽게 다시 열리지 않는다는 것도.


마흔 중반에 들어서니, 이제 내가 살아갈 날들에 더 집중하게 된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사랑하는 사람들,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의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애써 나의 감정을 감추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가 않다.

점점 시간이 아까워진다.

즐겁게 살아갈 시간들을 불필요한 관계를 맺는 것에 소모하고 싶지가 않다.




작가의 이전글 좋아하는 곳에 살고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