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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적인 도깨비 Apr 13. 2024

차이코프스키 - 비극적인 사랑과 죽음

교향곡 6번이 가져다준 운명

 차이코프스키(1840-1893)교향곡 6번은 초연 당시에는 평이 좋질 못했다. 그러다 다음 날 동생의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비창’이라는 부제가 현재까지 붙어 있게 된다.

 곡 자체의 구성도 상당히 특이한 편이고, 4악장 종결부에서는 현악기군의 꺼져가는 듯한 피치카토가 음산하게 끝을 맺기에 곡 자체가 상당히 어둡고 절망적이다. 게다가 차이코프스키는 1893년 10월 28일 교향곡 6번 초연 후 9일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이 죽음에 대하여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이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로는 그의 사망원인을 두고 당시 러시아에서 유행하였던 콜레라로 보는 견해이다. 차이코프스키가 실수로 마신 끓이지 않은 생수가 고열과 설사를 일으켜 급기야 새벽에 사망하였는데 이는 한동안 반론의 여지없이 직접적인 사인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전염성이 강한 콜레라였기에 감염된 차이코프스키의 시신에 입을 맞추거나 만지는 등의 사례를 두고 의심의 눈초리가 끊이질 않았다. 

차이코프스키의 장례. 콜레라로 사망했다면 공개적인 장례 절차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1978년에 이르러 비소중독에 의한 ‘자살’이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른다. 


 사실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자였다.

물론 모스크바 음악원 당시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결혼을 했었다. 하지만 단지 밀류코바가 결혼을 해주지 않으면 자살을 하겠다고 선언하자 마지못해 동성애자임을 숨기기 위한 또 다른 도피였을 뿐이다.

1877년 치욕 같은 짧은 신혼부부 시절.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자가 아니었으면 밀류코바와의 인연도 달라졌을까?

 결혼 전 미리 밀류코바에게 사랑과 잠자리는 없을 것이라는 구두선언(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이해하지도 못하니 정신적인 교류조차도 힘들었을 것이다-글쓴이)을 할 정도였는데, 결혼생활이 고작 80일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어린 남자 소년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 나중엔 자신의 조카에게까지 애정을 느낄 정도였다. 

1892년 차이코프스키와 조카 다비도프. 조카를 동성애적으로 사랑한 것을 큰 죄책감으로 여겼다. 다비도프는 모르핀 과다투약으로 사망한다

그러던 중 마지막으로 사귀게 된 어느 고관의 조카와의 행각이 가까운 지인과 차이코프스키가 졸업한 법률학교의 동창들에게 발각되면서 그의 동창생 중 한 명이 차이코프스키에게 자살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대해 차이코프스키는 '걸작'을 완성 후 그러하겠다고 약속했고, 교향곡 6번 초연 직후 비소를 탄 물을 마시게 된다. 그 증상이 콜레라와 비슷하여 그럴싸하게 포장하였다는 것이 지금에 와서는 거의 정설로 되었다(러시아는 지금까지도 동성애에 관해서는 가장 보수적인 국가임을 알아야 한다).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자이긴 하였으나 처음부터 동성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21세 청년 시절의 차이코프스키는 프랑스의 한 여가수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결혼까지 선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약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여가수는 동료 남자가수와 결혼을 해버리는 충격적인 실연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가 죽기 직전 이름을 불렀던 또 다른 여인이 있다. 

차이코프스키 일생의 빼놓을 수 없는 연정 폰 메크 부인. 차이코프스키와는 손 한 번 잡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완벽한 사랑을 나누었다

 9살 연상의 미망인이자 막대한 자산가이며 12명의 자식을 둔 나데츠다 폰 메크(1831-1894). 그녀는 일찍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매료되어 경제적이자 정신적으로 막강한 후원자 역할을 한다. 차이코프스키는 그녀에게 수시로 결혼 초 힘들었던 얘기와 음악에 관련된 얘기를 편지로만 무려 1,200여 통을 주고받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프스키를 후원하는 대신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된다는 서약을 하였고 실제도 둘은 얼굴도 모른 체 지내게 된다(사실 음악회나 공적인 자리에서 종종 부딪혔으나 의도적으로 회피했다고 전해진다-글쓴이).

 그러던 그녀가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차이코프스키가 죽기 몇 년 전에 갑작스럽게 후원을 중단하게 된다. 이후 차이코프스키는 교향곡 6번을 통해 부인에 대한 자신의 안타깝고 슬픈 감정을 최대한 섬세하고 극적으로 표현한다.

 그녀는 차이코프스키가 죽은 지 몇 개월 되지 않아 사망하였다.


 차이코프스키는 어릴 적부터 심한 우울증과 커서는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하여 습관적으로 진통제와 알코올의 힘을 자주 빌렸었다. 그러한 과정이 그의 말년까지 반복되면서 극도의 신경쇠약과 함께 무대에서도 자주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나타났다. 그러던 사이 편지 한 통으로 갑작스럽게 끝난 폰 메크 부인과의 결별로 차이코프스키는 더욱 심해진 육체적, 정신적 우울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마치 교향곡 6번처럼 휘몰아치는 격정적인 감정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말이다.

1863년 음악원 시절 23세의 차이코프스키. 외모답게 여러 여성에게 구애를 받았으나 성 정체성으로 인해 그런 여성에게 오히려 겁을 먹었다고
1865년 음악원 졸업 때의 25살의 차이코프스키
1893년 6월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모습으로 생전 마지막 사진인 53세의 차이코프스키




(모든 이미지의 출처는 구글에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4악장 Finale를 듣고 싶으시다면 클릭~

(카라얀, 베를린 필 하모닉. 1964년 연주. 출처: 베를린 필하모닉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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