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무릎의 학문 ㅡ 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론, 무릎의 학문
― 작가와 독자의 머슴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하여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론가로 한 가지 믿음만은 변하지 않았다. 평론이란 머리에만 존재하는 지적 유희가 아니라, 무릎으로 쓰는 학문이라는 자각이다. 평론가가 작가 위에 군림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아니, 본래 그런 시대는 애초부터 존재해서는 안 되었다.
평론의 자리는 단상 위가 아니라 바닥이다. 작가의 언어 앞에서 엎드려야 하고, 독자의 눈높이 앞에 허리를 낮춰야 한다. 평론가는 작가와 독자를 잇기 위해 존재하며, 그 둘을 오가는 징검다리에 불과하다. 그 다리가 높아지면 사람은 건너갈 수 없다. 다리가 길을 가로막으면 강물과 육지는 다시 단절된다.
평론가는 단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평론가가 작가보다 똑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자보다 박식해야 한다고도 여긴 적 없다.
외려 평론가가 누구보다 많이 모를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모름은 곧 경청의 자세이고, 경청은 곧 겸손의 태도이며, 겸손은 곧 타인의 언어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유일한 문이다. 작가가 언어로 건너온 세계는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다. 평론가는 그 세계를 깨뜨리거나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독자가 안전하게 들어가도록 문을 열어주는 존재다. 평론이란 문을 여는 작업이지 철문을 두들겨 부수는 작업이 아니다.

나는 말한다.
평론가는 작가와 독자의 머슴이라고. 머슴이라는 단어는 지금 시대의 감각으로는 다소 거칠어 보일 수 있다. 나는 기꺼이 머슴을 자처한다. 머슴은 대신해 주는 사람이 아니다. 머슴은 바닥을 닦고, 길을 내고, 짐을 지고, 주인보다 먼저 일어난다. 주인의 불편을 먼저 생각한다. 평론은 바로 그런 일이다. 작가의 글 앞에 먼저 엎드리고, 독자가 넘어질 만한 돌부리를 먼저 확인하고 치운다. 독자가 밟고 넘어갈 수 있는 등판이 되는 것이 평론의 첫째 자리라 믿는다. 평론가는 독자에게 작가와 작품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작품을 끌어안고, 자신의 등으로 독자를 밀어 올리며 말한다. 여기에 문장이 있다. 여기에 숨결이 있다. 여기에 세계가 있다.

이 믿음을 지키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평론가는 쉽게 오만해진다. 언어는 사람을 똑똑해 보이게 만들고, 전문용어는 사람을 우월하게 느끼게 만들며, 해석의 권력은 사람을 착각하게 만든다. 작품을 해석하는 순간, 작품을 관리하고 지배할 수 있을 것 같은 환각이 피어난다.
평론가는 작품을 소유할 수 없다. 작품은 작가의 것이고, 동시에 독자의 것이며, 마지막으로 시대의 것이다. 평론가는 그 경계를 잇는 안내자일 뿐이다. 안내자의 길을 넘어 상석에 앉는 순간, 평론은 죽는다.

하여, 나는 오늘도 무릎을 꿇을 곳을 찾는다. 무릎을 꿇는다는 말은 단순한 겸양이 아니다. 그것은 매번 새로운 세계 앞에서 다시 제자가 되는 일이다. 작품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는 평론가는 작품을 잃는다. 작가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는 평론가는 인간을 잃는다. 독자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는 평론가는 문학을 잃는다. 문학을 잃으면 결국 자기 자신을 잃는다.
평론의 목적은 해석이 아니다. 이해도 아니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작품이 독자 안에서 꽃 피울 수 있도록 흙을 고르고 물을 대는 일이다. 누군가 평론을 통해 작품을 더 쉽게 받아들였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최고의 찬사다.
반면, 평론이 작품보다 더 어렵게 만들어버렸다면, 평론은 이미 문학의 적이다. 설명이 작품을 덮어버릴 때, 평론은 본질을 잃는다.
나는 시인들이 스스로 작품의 해설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시인은 세계를 열고, 평론가는 그 세계의 문양을 읽는다. 시인은 감정의 뿌리를 심고, 평론가는 그 뿌리가 퍼져가는 방향을 확인한다. 시인은 숨결을 남기고, 평론가는 그 숨을 독자에게 건넨다. 둘은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시키는 존재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평론가는 반드시 더 낮아야 한다. 더 걸어야 하고, 더 버텨야 하며, 더 비워야 한다.

내 평론의 시작과 끝에는 오직 한 가지 원칙이 있다. 평론을 통해 독자가 작품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평론을 통해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다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 나는 매 순간 나 자신에게 되묻는다. 지금 쓰는 문장이 벽이 될 것인가, 혹은 다리가 될 것인가. 혹은 다리가 되어 흐르는 물길마저 끊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계속 머슴으로 남고자 한다.
작가의 문장을 짊어지고,
독자의 감정을 받쳐 안으며,
문학의 땅 위에서 무릎 꿇고 일하고자 한다.
그 자세를 잃는 순간, 평론가는 존재 이유를 잃는다.
나는 오늘도 고집스럽게 무릎을 꿇는다.
문학 앞에서.
작가 앞에서.
독자 앞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의 언어 앞에서.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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