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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퍼센트 Sep 02. 2024

평행선

글밭 일기 

아버지가 소파에 기댄 채 숨소리조차 없이 낮잠에 빠진 날이다. “니 아부지 죽었나?” 그 말을 건네는 엄마 목소리가 소풍 가기 전날 밤처럼 들떠 있다. 차마 활짝 웃지는 않지만 미묘한 빛으로 번쩍이는 은밀한 눈동자의 의미를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화가 울컥 치밀어 하고픈 말을 쏟아낸다. “엄마, 그러지 좀 마셔요. 아픈 아버지를 불쌍하게 좀 봐줘요!” 엄마 표정이 순간 얼음처럼 얼어붙는다. “아녀, 혹시 그런가 한 거여” 얼버무리면서도 아쉬운 내색을 숨기지 못한다. 너는 내 딸이니 네가 뭐라고 무서워하겠느냐는 심산이리라. 

 “에구, 징그러워! 저 영감탱이 때문에 내가 못 살어!” 아버지가 귀가 어둔 것을 믿고 엄마는 노골적으로 마음의 소리를 내지른다. 뇌경색, 혈관성 치매까지 앓고 있는 아버지는 엄마에게 골칫거리 일뿐이니까. 아버지가 하루빨리 저 세상으로 가길 엄마는 바라겠지. 

 아침마다 침대 위에 누운 채 아래층 인기척을 살핀다. 아버지는 쿵쿵 방바닥이 바르르 울릴 정도로 무거운 발걸음으로 걷는다. 그 울림이 핸드폰 알람보다 정확하다. 낡은 갈색 소파에 앉자마자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켜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레슬 마니아’ 미국 TV 프로그램을 날마다 열심히 쳐다보신다. TV소리가 어찌나 큰 지 위층에서도 어떤 장면이 펼쳐지는 것까지 훤히 알 수 있다. 궁여지책으로 헤드셋을 쓰고 도망쳐본다. 

 “막내야” 희미한 아버지의 목소리는 무슨 조화인지 성능 좋은 헤드셋마저 뚫고 들려온다. 택배트럭이 와도, 갑자기 텔레비전 리모컨 작동이 안 돼도 아버지는 무조건 나부터 찾는다. 어쩌다 느릿하게 1층으로 가보면 일순 숨이 턱 막힌다. 아버지가 보행기를 앞세우고 쓰러질 듯 서서, 앙상한 손으로 계단바닥을 탁탁 두드리고 있다. 내 마음의 귀를 향해 아버지가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 모아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것은 아닐까. 그것만으로도 게으른 마음을 접어두고 귀 밝고 몸놀림 잰 사람으로 살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리라.

 엄마의 얼굴은 휴지를 잔뜩 힘주어 구겨놓은 듯 잔주름투성이다. 그 얼굴이 길 가다 돈 주운 사람처럼 화사한 순간이 있다. 바로 드라마 시청 시간이다. “재미난 드라마나 볼 것이지. 저게 무슨 재미라고? 니 아부지는 맨날 저것을 왜 보는지 모르것어.” 

 아버지가 거실 텔레비전을 차지하면 엄마는 안방 텔레비전 앞으로 부리나케 달려간다. 부모님은 TV를 바통처럼 주고받으며 스쳐 지나가는 단 한 장면도 나란히 보지 않는다. 한 집에서 두 사람이 평행선처럼 영원히 마주치지 않고 서로 비켜서는 것이다. 

 치매를 이겨내는 케케묵은 적대감의 위력을 매일 목격한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마을 이장을 십여 년 하면서 발 넓은, 시골 지역유지로 행세하셨다. 엄마는 자기 이름 세 글자도 진땀 흘리며 쓰는 형편이라 항상 아버지에게 무시를 당했다. “당신이 뭘 안다고? 남자 하는 일에 간섭을 하려드나.” 그 시대를 대표하는 권위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여전히 선명하다. 두 분이 다정한 말 한마디를 주고받은 기억이 전혀 없다. 아무리 머릿속을 부지런히 뒤적여 봐도 글자하나 없는 빈 종이처럼 공허하다. 

 아버지는 청각장애로 자연스러운 소통과 대화가 끊어져 버린 지 이미 오래다. 그 탓에 부모님은 서로를 향한 마음의 벽이 켜켜이 두껍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긴 세월 쌓인 무관심과 냉대로 남과 북처럼 멀다.

 엄마와 내가 부엌에 같이 있어도 엄마 모습은 투명인간처럼 아버지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나에게만 식사 시중을 원한다.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지금 아버지에게 남은 것은 밥뿐이다. 잠깐 졸고 나면 아버지는 더욱 심하게 방금 전의 기억을 잃는다. “왜 밥 안 줘?” 아버지는 멍한 눈빛으로 되묻는다. “진지 잡수셔요!” 나는 목청껏 소리 높여 말을 하면서 손짓으로 크게 수저질 시늉을 한다. 꼼짝없이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몇 번이고 밥을 차려드린다. 그렇지 않고는 다른 방법을 도무지 찾을 수 없지 않은가.

 언제부턴가 엄마도 혼자만의 식사를 한다. “니가 만든 음식은 당최 싱거워. 맛이 없어서 못 먹응께” 식탁에  턱 하니 소금 통까지 얹어 놓고 반찬 위에 소금을 마구 뿌린다. “짠 음식은 고혈압에 나쁘다고 하던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떠들어도 헛짓이다.  

 엄마는 동네 회관에서 할머니들과 화투놀이를 즐긴다. 쉬는 날 없이 심지어 감기 기운 있어도 엄마는 동네 회관을 향한다. 붉게 물든 해가 뒷산으로 넘어가고 어스름한 시간에야 엄마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온다. 현관문을 열어젖히는 소리조차 경쾌하고 온몸에서 생기가 살아나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평생 싫어하는 사람과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것은 더없는 형벌이리라. 부모님이 서로 만나지 않고 각자 살면 행복한 여생을 누릴 텐데. “앞으로 몇 년이나 산다고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하냐.” 엄마는 아버지의 존재를 부담스럽게 여기면서도 다른 궁리를 하지 않는다. 

 부모님은 서로 없는 듯 한방에서 지낸다. 잠을 잘 때도 두 분 사이의 거리는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아버지가 머리를 둔 방향과 반대쪽으로 엄마는 모로 돌아눕는다. 부모님이 각방을 쓰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아무리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도. 

 나는 부모님을 양쪽에 두고 서 있다. 남쪽도 북쪽도 아닌 중간지대, 비무장지대처럼 애매하다. 두 사람 사이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내 모습은 그대로 어정쩡하다.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지는 중이다. 그 옆에서 불통의 고단함으로 지친 엄마를 모른 척할 수도 없다. 결국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는 게 나의 처지인 셈이다.

 두 분이 영화 속 노부부처럼 다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부모님이 처음 본 사람보다 차가운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은 이미 익숙한 일이니까. 두 분의 안타까운 마지막 모습까지도 다정한 눈길로 지켜봐야 하는 것이 자식인 나의 몫이다. 다만 부모님이 다가올 그날까지 다툼 없이 평화롭게 지내길 바라는 마음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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