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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퍼센트 Aug 02. 2024

나의 세 번째 손, 당신에게

글밭일기 

나의 세 번째 손, 당신에게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말고 월급 받은 만큼만 일해요.” 출근하는 당신을 살며시 안아주면서 이 말을 날마다 건네요. 당신의 직장 상사가 들으면 버럭 화를 낼 소리를 뻔뻔하게 말해요. 그만큼 넘치게 성실한 당신을 아니까요.

 결혼 20년, 긴 시간을 함께 지나왔네요. 당신은 나의 열세 번째 맞선 상대, 질리도록 맞선을 보고 그 끝에 당신을 만났어요. 나와 달리 당신은 첫 맞선을 본 거고요. 처음엔 당신의 그 말조차 쉽게 믿지 않을 만큼 난 지쳐있었어요. 

 농촌 벌판 외딴집, 고무슬리퍼도 꿰매 신는 엄마가 안타까워 한 지붕 두 살림을 덜컥 시작하자고 했네요. 시골로 이사 오는 것이 단순치 않음에도 당신은 선뜻 따라주었지요. 따스한 밥을 부모님께 내 손으로 지어드리고 싶다는 순진한 마음이었어요. 

 그러다 평생 농부 아버지에게 갑작스레 병이 찾아왔고요. 아버지가 뇌졸중, 치매환자가 된 후 농사일이 우리 앞에 덜컥 닥쳤어요. 상인 집안에서 자란 당신과 겉만 농촌사람인 나는 실수투성이 어설픈 농부가 되어야 했지요. 그럼에도 당신과 둘이면 세상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다고 굳게 믿어 두려운 줄 몰랐어요.

 이웃 어르신께 관리기 사용법을 배우는 당신 모습은 첫걸음을 떼는 아이처럼 서툴렀어요. 그 모습조차 내 눈에는 더 할 수 없이 자랑스러웠고요. 해가 바뀌고 농사철을 맞은 당신은 보란 듯이 겨우내 잠자던 관리기를 점검하네요. 바퀴 상태를 살피고 찰칵찰칵 핸들을 잡는 폼이 제법 능숙해요. 쾅쾅 요란한 소리를 내는 관리기를 끌고 밭으로 향하는 당신의 뒷모습, 내 눈에만 한없이 든든해 보이는 걸까요. 

 모내기 후 당신은 노란 긴 장화를 허벅지에서 허리까지 단단히 두르고 질퍽이는 논에 들어가요.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모 이어 붙이기를 하는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나는  사진을 찍어 놓아요. 직장을 다니며 쉬는 날도, 농사일을 해야 하는 일복 많은 당신은 한마디 불평을 할 줄 모르네요. 

 내 위로 오빠 둘, 누구도 아버지에게 관심이 없어요. 아버지는 온전히 우리의 보살핌을 받아요. 내가 아무런 힘이 될 수 없어 가장 아쉬운 공간은 남자 목욕탕이에요. 그곳에서  만난 어르신들 이야기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잊을 수 없어요. 

 “아이쿠, 어르신 거동이 불편하시네유. 세상에 이렇게 착한 아들이 어디 있데유, 참 보기 좋네유.” 쏟아지는 칭찬세례에 당황한 당신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고요.

‘저는 아들이 아니에요. 장인어른 모시고 온 사위예요.’  이 말을 속 시원히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그대로 품고 온 순수한 당신. 

 아버지가 미용실 다니는 것을 불편해하면서 가정용 이발기를 사용한 첫날은 어떤가요. 내가 이발기를 쥐고 움푹 한군데만 잘라놓고 어쩔 줄 몰라 했던 때 말이에요. 살짝 스치기만 했는데 어이없이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확인하고,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올랐잖아요.

 “이리 줘 봐요, 군대에서 익힌 솜씨를 보여줄 테니” 당신은 그럴듯한 자세로 아버지의 머리카락을 능숙하게 다듬어 나의 실수를 감쪽같이 감춰주었어요. 그 후 아버지의 이발은 지금껏 당신이 맡고 있고요. 아버지는 이름난 미용실보다 당신의 가위질 솜씨를 가장 편안하게 믿으셔요.

  아버지는 치매 환자가 되시곤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리셨지요. 이유 없이 불쑥 화를 내는 경우도 많고요. 그럼에도 아버지가 당신에겐 단 한 번도 성질을 부리지 않으셔요. 당신에게 직접 다정한 말 한마디를 건넨 적은 없어도 나는 아버지 마음을 짐작할 수 있어요. 아버지는 나를 포함해 여느 자식보다 살뜰한 당신을 믿고 계셔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함없는 마음으로 내 곁을 지켜주는 유일한 사람, 당신이에요. 마음의 귀를 항상 열어두고, 속삭이는 귓속말도 흘려듣지 않지요. 고봉밥 나물뿐인 시골밥상을 최고의 한식 상차림으로 알고, 날마다 아침 햇살처럼 환히 웃어주는 다정한 당신이에요. 보이지 않는 나의 세 번째 손, 당신은 나에게 가장 친근하고, 소중한 사람이에요.      

말보다 글이 가까운 당신의 아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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