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해 화려하고 치열한 20대를 보냈다. 약 1년간의 장거리연애 끝에 주말부부와 워킹맘이 되었다. 퇴사 후 남편과 살림을 합쳤다. 둘째를 임신하면서 경단녀가 됐다. 주말부부, 워킹맘, 경단녀. 3관왕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는 자부심이 있을 때였다.
두 돌까지는 내 품에서 키워야겠다는 소신과 욕심으로 전업주부를 자처했다. 자존감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고, 내면을 많이 들여다봤다.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둘째를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다시 일을 해보기로 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마음 편히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정규직은 출퇴근이 부담스러웠고, 일반 기업은 치열하게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대기업 출신 이력은 쓸모가 없었다.
나에게 남은 카드는 교원자격증. 교육청이나 과학관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 강사로 시작했다. 프리랜서란 이름으로 계약서 한 장 없이 채용되었다.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웠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자체만으로 감사했다. 집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프로그램 강사는 우리 아이들 등하원에 거의 지장이 없었다. 수업시간에 맞춰 해당 장소에 가서 수업을 하고 바로 퇴근하는 시스템이었다. 전공을 살려 수업을 하는 일도 보람 있었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 십여 명의 강사들이 모여 프로그램 구상을 하고 사전실험을 하며 기나긴 회의를 했다. 교안을 만드는 일도 꽤 재미있었다.
수업은 초등학생들이 일상생활에서 호기심 가질 수 있는 실험이나 실습을 하고, 과학 원리를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아이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에 힘이 났다. 신기한 원리를 접하고 흥분하는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선생님!"
"선생님, 이것 좀 봐주세요!"
"선생님, 선생님!!"
매 수업마다 과학 실험을 하는 관계로 자질구레한 작업이 많았다. 건전지 비닐을 뜯을 때, 바람 가득 넣은 풍선을 묶을 때 아이들은 선생님을 불러댔다. 전선 피복을 벗길 때, 로봇에 눈알을 붙일 때도 늘 애타게 불렀다. 난 매 학기마다 만족도 조사를 받는 프리랜서 강사였기 때문에 항상 친절했다. 수업 후 뒷정리도 적당히 하고 와야 뒷말이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프로그램 강사로 일하면서 스스로 매우 만족스러웠다는 점이다. 전업주부로 지내다 전공을 살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과학관 강사라고 말하면 꽤 근사해 보였다. 시간당 받는 수당도 제법 쏠쏠했다.
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리고 나서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프리랜서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