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강사가 계약서를 쓸 때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A 중학교 시간강사로 3일짜리 계약서를 쓸 때였다. 코로나로 전 세계가 시끄러웠던 해, 교사들도 이를 피해 갈 수 없었기에 긴급으로 대체인력을 구하는 공고가 쏟아져 나왔다.
당시 H중학교에서 일주일에 이틀간 시간강사로 일 년 가까이 근무하던 중이었다. 이틀간 바짝 일하고, 사흘은 집안일과 휴식, 육아와 자기 계발을 해보겠다는 큰 그림이었다.
A 학교에서 5일간 근무할 교사를 구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3일만 가능하다고 했더니 그렇게라도 하자고 했다. 대체인력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임을 예상했지만, 계약서를 쓰며 교감선생님께서 고맙다고 하셨다. 그 순간은 내가 갑이었다.
시간강사는 수업시간에 따라 수당을 지급받는다. 수업을 연속으로 쭉 하고 빨리 퇴근하는 게 좋았다. 처음 받은 시간표는 1교시, 3교시, 5교시, 7교시 이렇게 4차시였다. 1교시가 시작되는 8시 50분부터 7교시가 끝나는 오후 3시 50분까지 대략 7시간을 학교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중 내가 하는 수업은 단 4차시. 연속으로 4시간만 머물며 수업을 하고 싶었다.
일반적으로 시간강사가 근무조건을 요구하기는 어렵다. 그동안 몇 군데에서 짧게 근무했지만, 그때마다 세부적인 근무조건을 묻거나 내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건 쉽지 않았다. 말 못 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절대 안 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괜히, 그냥, 왠지, 계약서 앞에서 작아지는 느낌이 드는 건 비정규직으로서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는 당당하게(사실은 매우 공손하고 부드럽게) 시간표 조정을 미리 요청했다. 상호 배려가 가능한 상황이었고, 내 가치는 나 스스로 높이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과는 다르게 용기를 냈다.
시간표가 일부 조정되었다. 여유롭게 그리고 한결 높아진 자존감을 느끼며 출근했다. 역시 내가 필요한 건 참지 말고 표현해야 상대방이 안다.
시간강사로 짧게는 3일에서 5일 근무하는 상황은 이제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유선으로 근무일정을 확인하고, 학교를 방문해 계약서를 쓰면서 교감선생님과 인사를 나눈다. 요구사항이 있으면 교감선생님께 말씀드려 볼 수 있는 좋은 순간이다.
5일간 전일제로 모 중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정시 퇴근보다 1~20분 일찍 퇴근하면 아이의 하원 차량 시간에 맞출 수 있어 여러모로 수월해지는 상황이었다. 정시 퇴근하면 유치원까지 데리러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해서 시간과 발품이 좀 들었다.
계약직 입장에서 첫날부터 일찍 퇴근하겠다는 말을 하는 건 정말 어려웠다. 그냥 내가 좀 고생하고 늦게 데리러 갈까, 같은 반 엄마에게 부탁할까 생각도 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일찍 퇴근한다고 말하면 밉보이진 않을까, 다음 계약할 일이 있을 때 나에게 기회를 안 주는 건 아닐까...... 정말 많이 고민했다.
당당해져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일만 근무하는 상황이라 따로 업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내가 맡은 수업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그냥 책상을 지키고 있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땐 미처 몰랐지만, 조퇴나 지각 등 교원의 복무규정이 있어 눈치 보지 않고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땐 몰랐다.
10분 정도 빨리 퇴근해도 되겠냐는 한 마디를 하기 위해 며칠 전부터 혼자 머릿속으로 얼마나 시뮬레이션을 했던가.
출근 첫날, 교감선생님과 함께 교장실로 가는 복도에서 준비했던 그 말을 꺼냈다. 고민했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바로 허락해 주셨다. 역시 필요한 건 참지 말고 표현해야 하는 거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내가 필요한 건 나 밖에 모른다. 도움 받길 원하면, 배려받길 원하면, 관심받길 원하면 표현해야 한다. 표현한다고 해서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아예 이루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