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2학기 중간고사
딩동댕.
종소리가 울렸다. 비장한 표정으로 시험지 표지를 넘긴다. 쓱싹쓱싹 답안지에 마킹하는 소리가 가득하다.
중간고사 기간. 시험감독은 부담스러우면서도 부담이 없다. 입시에 내신성적이 중요해서 부담스럽고, 수업준비 없이 감독업무만 하면 되니 부담이 없다.
반년만에 시험감독을 앞두고 긴장됐다. 그래도 괜찮다. 내가 주로 들어가는 고3은 1학년부터 지금까지 중간 기말고사를 10번 경험한 베테랑이다. 아이들을 믿기로 했다.
고3 2학기 내신은 입시에 반영되지 않는다. 중간고사는 그들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진로가 정해져서, 수능 최저등급이 필요 없어서, 졸업만 하면 돼서 등 이유는 다양했지만 대체로 시험에 뜻을 두지 않았다.
창가줄부터 답안지와 문제지를 차례로 나눠준다. OMR카드는 컴퓨터용 사인펜으로만 마킹해야 한다. 학생들은 컴퓨터용 사인펜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컴싸. 제일 처음 들었을 땐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데 몇 초 걸렸다. 이젠 나도 컴싸라고 부른다.
"답안지에 반 번호 이름 마킹하세요."
한 명이 손들었다.
"선생님, 저 컴싸 없는데요."
고3이다. 중간고사 둘째 날이다. OMR은 무조건 컴사다. 시험 치러 온 게 장하구나. 솔직하게 말하는 용기가 가상하구나. 교실 공용 필기구함을 뒤져 겨우 한 자루 찾아냈다.
본령이 울렸다. 시험에 뜻이 없는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속출했다. 개인정보 마킹을 하고 답안지를 다 채운 뒤 엎드리면 양반이었다.
답안지와 문제지를 받자마자 책상 가운데 고이 모아놓고 엎어져 잠을 청하는 유형. 엎드리자마자 숙면에 빠지는 게 신기하다. 이들은 종료령이 울릴 때까지 깨지 않는다. 그래서 깨어있을 때 개인정보라도 마킹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개인정보 마킹 후, 거침없이 한 번호로 찍어 답안지를 완성한 뒤 잠드는 유형. 비교적 성실하다고 해야 할까. 학생의 본분을 잊지 않고 답안을 공란으로 두지 않는 꼼꼼함에 감탄했다.
작품활동에 진심인 유형. 종료령이 울릴 때까지 엎드리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끄적인다. 가까이 다가가면 시험지의 여백에 작품활동을 하는 중이다. 아기자기한 캐릭터를 그리기도 하고, 고개를 쉼 없이 움직이며 본인이 신고있는 실내화의 지비츠를 그리기도 하고, 그럴듯한 네 컷 만화를 그리기도 한다. 남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알뜰하게 쓰는 건가 싶기도 하고 자는 것보다 낫다 싶기도 하다.
사색하는 유형. 한 번호로 찍거나 스캔하듯 빠른 속도로 답안지 마킹을 완료하면 그때부터 시작이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있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다.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밤낮없이 바쁘게만 움직이는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순간이리라. 직장생활을 하며 물리적 심리적 여유가 없어 사색이라는 걸 해 본 지 너무 오래됐다던 남편의 이야기가 떠오르면서, 잠 대신 사색을 선택한 학생이 기특했다.
종료령이 울릴 때까지 보고 또 보는 유형. 시험점수가 가장 높은 유형일 거다. 문제를 다 풀고 마킹이 끝났더라도 다시 본다. 이미 마킹한 답안지를 반복해서 확인한다. 학창 시절 나도 이런 학생이었다. 내가 푼 문제도 다시 풀고, 답안지에 표기한 번호도 다시 확인하고, 시간이 남으면 답안 번호가 골고루 분배되었는지도 세어봤다. 그런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내가 푼 문제에 확신이 더 커졌고, 종료령이 울리자마자 답안을 맞추거나 선생님을 찾아가 답을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시간을 자기 식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며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 학창시절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내적 친밀감이 느껴졌다.
중간고사 셋째 날, 수학시험. 신문 훑어보듯 시험지를 슥슥 넘기며 답안지에 마킹했다는 학생의 일화를 들었다. 놀라움과 감탄의 눈빛을 보내던 선생님을 향해 수줍게 내뱉은 학생의 한 마디.
"예전부터 이런 거 꼭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고3 2학기 기말고사는 어떤 모습일까.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