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감독 2
벌써 1년이 지났다. 작년 대망의 수능일.
내가 시험을 치는 것도 아닌데 긴장되어 밤잠을 설쳤다. 얕은 잠을 자다가 알람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문자가 와있었다.
[수능감독관 안내]
1. 오전 7시 반까지 등록완료
2. 도장 지참
3. 굽 있는 신발 금지(실내화 또는 운동화 준비)
4. 아날로그시계 준비
5. 우산 챙겨 오세요
새벽 6시 30분에 발신된 문자였다. 전날 저녁 9시 무렵에도 같은 문자가 왔었다. 드디어 수능일이구나. 잠이 싹 달아났다. 그나저나 비 예보가 있다니 시험 끝나고 학교 주변이 아수라장이겠구나.
학교로 들어가는데, 지킴이 선생님이 막았다.
"시험 치러 오셨어요?"
"아, 감독관입니다."
"증빙자료 좀 보여주세요."
감독관 차량에 부착시키는 종이를 보여드렸다. 그제야 통과시켜 주셨다. 통제구역에 프리패스한 느낌이었다.
'시험 치러 왔냐고? 나 좀 어려 보이나?'
짧은 순간에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명부에 사인을 하고, 감독관 목걸이와 간식 가방을 받았다. 귤, 사탕, 초콜릿, 젤리 등 먹을거리가 가방 한가득 들어있었다. 오늘의 고난이 예상되었다. 아침메뉴로 나눠준 참치김밥을 우걱우걱 씹으며 결의를 다졌다.
" 1교시 감독관 배정표 참고하십시오."
드디어 1교시 감독관 배정표가 나왔다. 매 교시가 시작되기 직전, 감독관 배정표가 적힌 커다란 종이를 방 붙이듯 게시했다. 감독관이 연루된 부정행위를 차단하기 위해서 인 듯했다. 모두 칠판 앞에 와글와글 모여 자기 이름을 찾느라 바빴다.
'앗싸! 부 감독이다!'
우연인지 나는 '부' 감독으로 들어가게 됐다. 옆에서 다른 감독관 하는 것을 보며 눈치껏 익히면 그다음부터는 '정'이 되더라도 해볼 만했다. 시험지를 배부하는 별도의 공간은 긴장감이 넘쳤다.
본인이 들어갈 고사장 번호 앞에 정, 부 순서대로 줄 서서 인원체크를 했다. 안내사항을 전달받고, 정 감독관이 시험지와 답안지를 받아 수령했다는 사인을 한 뒤 줄지어 경건하게 교실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동안, 서로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나누며 나는 수능감독이 처음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혹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꼭 얘기해 달라고도 부탁드렸다.
부 감독의 위치는 대략 교실 맨 뒤쪽 가운데. 그런데 교실은 좁고 책상은 많아 내가 있을 곳이 좁았다. 섣불리 움직이다가 수험생들에게 피해가 될까 가급적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한 자리에 서 있었다.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감독관 옷 색깔이 너무 튀어 자꾸 눈에 띄니 구석으로 이동해 달라고 요청한 학생이 있었다고 했다. 극도의 긴장감으로 인해 시험 중 기절한 감독관이 있었다는 말도 들었다. 걸을 때 나는 발소리나 팔이 패딩을 스치며 나는 소리에 민원이 들어오는 경우도 자주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숨만 쉬고 있기로 했다.
1교시 국어가 무사히 끝났다. 이 정도면 할 만하다는 생각으로 대기실로 복귀했다. 대기실에는 또다시 방을 붙이듯 커다란 종이에 감독관 명단이 붙어있었다. 나는 또 감독이었다. 1교시 답안지를 제출하고 2교시 전달사항과 문제지를 받으면 다시 교실로 들어가야 될 시간이었다. 화장실만 급하게 다녀와서 입실했다.
2교시 수학은 무려 100분. 다행히 '부'로 배정받아 큰 부담은 없었으나, 100분을 가만히 있는 것은 매우 큰 부담이었다. 할 수 있는 건 숨쉬기와 멍 때리기. 그리고 유일하게 반입가능한 감독관 매뉴얼 읽기. 이미 낡은 매뉴얼을 처음부터 꼼꼼하게 읽고 다시 읽고 반복해서 읽었다. 얘들아~ 무한으로 반복하면 책 내용이 머릿속에 다 저장되더라.
나도 수학 문제를 같이 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그게 나을 것 같았다.
3교시는 영어시간이지만 나는 휴식. 어라? 영어는 70분이다. 손해 본다는 생각도 잠시, 서둘러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을 먹고 앉은 채로 잠깐 졸았다. 이래서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하는 거 아니야? 간식가방에 손을 넣고, 잡히는 대로 꺼내어 입에 넣었다. 체력이 국력이다. 젊은 교사 위주로 뽑는다던 이유가 이해됐다.
대망의 4교시는 한국사와 탐구. 도합 107분 동안 세 과목을 순서대로 치르는, 감독관에게 가장 난도가 높은 시간이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과목만을 풀어야 하는 규정에 따라, 수험생의 인지부족으로 부정행위 처리될 가능성도 있었다. 감독관은 부정행위를 적발하는 역할 이전에, 부정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는 말에 공감했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건 순간일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그 중요한 순간을 지켜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본종이 울리면, 해당 시간에 다른 선택과목 문제지를 실수로 꺼내놓아도 부정행위로 간주된다. 이런 학생들이 있을 가능성을 대비해, 감독관들은 본종이 울리기 전인 시험지 배부 시간과 교체 시간에 크로스 확인을 하며 집중해야만 했다. 유일하게 감독관 3명이 배정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뒷문 바로 앞에 감독관용 의자가 하나 있었다. 매우 앉고 싶었지만, 제일 뒷자리 학생과 너무 가까웠다. 내가 앉으면 학생이 신경 쓰일 것 같았다. 만약 내가 학생이라면 불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수십 번 고민하다가 앉지 않았다. 혹시 앉았다가, 그 학생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어쩌나,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 시간이니 불태우리라는 의지로 견뎠다.
딩동댕. 드디어 끝났다.
휴대전화를 나눠주기 전, 학생들이 가방을 챙기며 대기하는 시간에 비로소 그 의자에 앉았다.
"(인자하게) 여기 앉고 싶었는데, 네가 신경 쓰일까 봐 안 앉았어."
가만히 있는 학생에게 괜히 생색을 냈다.
"앉으셔도 됐는데. 전 괜찮아요."
'미리 물어볼걸 그랬나.'
"(인자하게) 혹시라도 너 불편할까 봐. 다른 시간에는 선생님들이 여기 앉으셨어?"
"네. 그런데 문제 푸느라 신경 쓸 겨를도 없었어요."
명답이었다. 내 우려와 달리, 신경 쓰지 않고 시험에 집중했다는 그 학생이 대견했다.
딩동.
[입금안내] OO고등학교 17만 원
통제실에서 답안지를 검토하는 동안 대기실에서 가방을 챙기는 중 반가운 문자가 왔다. 수능감독관 수당 입금. 돈 받고 할래, 돈 안 받고 안 할래 묻는다면 난 후자를 선택하겠다. 감독관 도장을 누락한 선생님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모든 검토가 끝날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드디어 해산.
바깥은 비가 내리고 어둑어둑했다.
내가 고3이던 수능 당시, 마지막 시험이 끝나는 종이 울리는 순간 울컥했던 감정이 지금도 기억난다. 드디어 결승선에 들어왔다는 후련함이었는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이었는지, 결과가 나쁠 수도 있다는 걱정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가방을 챙기며 가슴속 저 깊은 곳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올라왔던 그 순간이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고생 많았다. 수험생, 학부모. 그리고 수능 감독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