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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이슬 Nov 20. 2024

수능이 끝난 교실

뜨개질과 퍼즐 그리고 부루마블

교실 문을 열자 향긋한 귤 향기가 난다. 교탁 앞쪽에 여학생 네 명이 책상을 마주 붙인 채 500피스 퍼즐을 맞추고 있다. 책상 한쪽에는 귤껍질이 소복이 쌓여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곧 완성되겠다.

그 뒤에는 명화 그리기가 한창이다. 손톱보다 작은 번호마다 물감을 칠하며 부지런히 붓질한다. 그림의 진척도를 보여주듯, 붓통에는 진회색 물이 찰랑거린다. 

옆에는 뜨개질이 한창이다. 이미 목을 두 바퀴 감을 만큼 길다. 며칠 전까지 흐트러짐 없이 책에서 눈을 떼지 않던 학생이었는데, 지금은 편한 표정으로 옆자리 아이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 와중에 손은 쉼 없이 목도리를 뜨고 있다. 내일 와보면 목을 세 바퀴 이상 감고 있을까.

교탁 옆에는 바둑과 체스가 다섯 통 쌓여있다. 아직 사용한 흔적이 없다. 정말 심심해지면 이 상자를 열겠지.


어느 교실에 들어섰더니, 부루마불을 막 시작했다. 돈을 정리하고 나누고 준비하는데 시간이 제법 걸린다. 

괜찮다. 이들에게 시간은 충분하다. 4교시까지 최대한 즐길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하다.

땅을 하나 살지 말지 심사숙고하며 자산현황을 파악한다. 파산이 가까워진 아이는 지난날 고민 없이 사들인 땅 증서를 들추며 한숨을 내쉰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는 갈수록 흥미진진해지자 빨리 이 판이 마무리되어 새 게임에 합류하려고 들썩거린다.


수능이 끝난 지 5일째. 복도에 걸린 전자시계는 여전히 D-0에 머물러있다. 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태블릿 PC나 휴대전화에 얼굴을 묻고 있다. 면접 준비를 하는 건지 여가를 즐기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인가, 수능 전보다 엎드려 자는 아이들의 수가 줄었다. 


수능 전과 수능 후의 가장 달라진 점은 일과 중 교실에서 휴대전화를 소지하고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수능 전날까지는 철저하게 휴대전화를 수거했다. 태블릿 PC는 인강이나 면접 준비 등의 목적으로만 사용했다. 악용하는 사례를 방지하고자, 태블릿 PC를 쓸 때는 책상을 돌려 복도나 창문을 바라보고 앉도록 했다. 담임 선생님의 영향력이 강한 교실은 아예 교실 뒤를 바라보고 앉게 했다. 수업 시간에 불필요한 태블릿 PC 이용을 자제하고자 했던 교사들의 마지막 노력이었다. 


이젠 누구나 당당하게 휴대전화와 태블릿 PC를 쓴다. 주로 유튜브 시청이나 영화 감상이다. 게임도 한다. 나는 수능이 끝나고 뭘 했던가. 그 당시에는 기껐해야 교실에 설치된 TV로 영화를 보는 정도였다. OTT가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선생님이 임의로 틀어주는 영화만 봤던 것 같다. 영화 제목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책을 읽기에는 교실 불이 꺼져있어 어두웠다. 뜨개질을 하는 친구가 있었고, 모여서 하루종일 떠드는 무리도 있었다. 롯데리아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는 두 명이 메뉴판을 놓고 메뉴별 재료를 함께 외우던 장면도 떠오른다.  


며칠 뒤에는 지역 고3 대상의 축제가 있단다. 덕분에 그날 수업이 사라졌다. 지난주까지 그 누구보다 힘들었을 고3. 당분간 학교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이다. 합격자 발표가 나기 전까지. 

살면서 지금 이 순간의 자유를 돌이켜볼 때가 오겠지. 아무 생각없이  온전한 휴식을 취했던 때가 있었음에 감사하고 안도하고 위로받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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