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울을 긍정한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안 하는데, 종종 사는 게 막막하고 귀찮다고 느낀다. 하루하루를 즐기는 편이다. 그러나 문득 그 하루가 허무해진다.(평균 달에 한 번쯤은 그러는 것 같다.) 나의 하루는 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함으로써 의미와 댓가를 받는다. 그 중 일부를 소비한다. 일부는 저축한다. 그것 역시 이후 생길지 모르는 커다란 지출을 위한 것이므로,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나의 온전한 ‘오늘’을 지키기 위함이다.
물론 나는 비교적 행복하게 사는 편이다. 어떤 일이 발생하면 해결책과 가능성을 중심으로 사고한다. 헬조선이다 뭐다 하지만 세상은 나쁜 사람보다 착한 사람이 더 많다. 사랑을 믿고 협력을 추구한다. 꿈,사랑, 유대 같은 귀 간지러운 개념에 울컥 감동한다.
다만, 어차피 삶이 결국 사이클을 갖고 있다면 애써 발버둥 치며 살아갈 필요 있는지 모르겠다. 삶의 목적이 기분 좋음과 행복이라면 나는 이미 그러고 있다. 그래서 삶의 지속이 갖는 의미를 잘 모르겠다.
한 때 나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것들이 있고 싶었다. 가장 대표적인 건 내가 그리는 만화(유쾌한 친구들)였다. 이 만화를 완결 낼 때까지는 절대 죽을 수 없어. 그건 이 만화를 기다리는 독자와의 약속이야! 허어, 정말이다. 이런 생각을 했었다. 지금은 아니다. 만화는 내 의기소침한 우울과 함께 해준 내 10대~20대 중반까지의 구원자였다. 나는 특별하고 싶었고, 나를 특별하게 여기는 이가 내 주변에 없었다. 나는 나로써의 흔적을 불특정 다수가 모인 공간으로 넓혔다. 인터넷은 얕았으나, 적합했다. 그 특별함을 증명받으며 스스로 위로가 되었다. 지금도 만화는 나에게 보물 1순위다. 그러나 완결 낼 때까지 죽을 수 없다? 미련이고 오기일 뿐이다.
우린 내가 태어날 곳과 일자를 정하지 않은 채로 태어났다. 거기에 자의는 없다. 태어났으니까 사는 거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과거가 쌓인다. 과거는 기억이고, 남은 기억은 미련이다. 즉, 과거를 붙잡고 있기에 미래를 살아간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살아가며 역할이 쌓인다. 그 역할은 어깨 위로 올라가 자리 잡는다. 나이가 들수록 어깨에 쌓이는 게 많아진다. 그 중 몇몇 역할은 소명이 된다.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며 ‘나’라는 사람이 하고자 하는 의미가 된다. 그 의미를 위한 모든 움직임이 신성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그 소명이 나에게 ‘즐거움’이고 타인을 위한 ‘역할’이 된다면, 오늘에 만족하고 사는 이에게 남는 건 타인을 위한 ‘역할’이다. 즉, 기억에서 자유롭고 현재에 지극히 만족하는 이에게 있어 나의 하루는, 그걸 지속해야 하는 이유는 타인을 위함이다.
어찌보면 상당한 오지랖이다. 내가 뭐라고 남의 인생에 개입한단 말인가? 나와 관계가 어떠하든 그에겐 그의 인생이 있다. 그의 인생에 위기를 막기 위해 내가 살아준다고? 건방지기 그지없다. 오만이다.
자는 거, 먹는 거, 섹스하는 거, 인정 받는 거, 존경 받는 거, 누군가보다 위에 있는 거, 자익을 위해 이기적인 논리를 소리치는 거, 좋아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하는 거, 가족을 위하는 거, 약자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거, 세상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거. 무엇이 되었든 세속적인 개념이다. 상대적인 존귀 여부는 있으나 어차피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살아냄이기에.
오늘도 산다. 재밌다. 새로운 게 있는 것보다 없는 편이 더 안정적이고 즐겁다. 동시에 막막하고 귀찮다. 과거에 메인 이들의 도피성 죽음은 아프지만, 현재에 충실한 이의 죽음은 새로운 축복일 지도.
나는 우울을 긍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