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다시 해외로

여전히 방황 중이나, 그럼에도 살아내는 나날들

by 삼층주민


20대 때 2년 남짓 생애 첫 해외생활을 했었다. 마냥 어렸던 나는 어설프게 넓어진 시야와 함께 한국에서 떳떳하게 공채로 취업 한 번 해보겠다며 한국으로 귀국했더랬다. 어려운 취업시장에서도 운이 좋아 감사하게도 큰 공백기 없이 취업에 성공했으나, 나는 줄곧 해외생활을 하며 자유롭고 여유롭던 해외에서의 나를 그리워했다.


빠르게, 또 더디게 지나간 지난 5년 간의 한국 대기업 생활은 많은걸 남겨주었다. 가장 큰 소득은 한국에 돌아와 적응도 잘 못하는 나를 꾸역꾸역 밖으로 끄집어내주던 소중한 선후배, 동기들이었다. 일머리가 뛰어나신 분들, 인성 좋은 분들, 사회성 뛰어나신 분들을 보며 일머리가 부족한 나를, 인성이나 사회성이 훌륭하지 못한 나를 질책하며 성장하기도 했고, 그 반대의 분들을 보며 반면교사로 삼기도 했다.


4년 4개월을 지냈던 회사에서 퇴사하고 새로운 곳으로 이직했으나 그 곳에서는 10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퇴사하게 되었다. 짧은 시간동안 많은 것을 배웠고, 어디하나 모난 분들 없이 좋은 분들과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다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감을 안겨주었던 극악의 업무량과 '창사 이래 처음'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맞은 영업이익 적자와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바라보며,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히 살지언정 이 곳은 벗어나야겠다'라는 생각을 했고, 더 나아가, 더 이상은 나와 맞지도 않는 회사 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대책없이 나오게 되었다.


직장을 다니던 시절 줄곧 꿈꾸었던 여유로운 아침을 드디어 맞을 수 있게 되었던 나는 퇴사 바로 다음날, 오전 8시에 도서관에 앉아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자기객관화가 안되어도 너무 안됐던 나는 사실 소속감이 너무도 중요한 사람이었고, 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지도 않았으며, 디지털노마드를 줄곧 동경해왔으나 시행착오를 겪으며 도전할 끈기도, 베짱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회사 생활이 안맞는 사람 생각했는데, 실은 그 누구보다도 회사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하는 심정으로 회사 다니면서 해볼 수 없는 그 무언가라도 해보자는 마음에 대책없이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났다. 약 6주 간의 여행은 다시금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가를 체감하게 해주는 귀한 경험이 되었으나, 돌아가면 다시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도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촌오빠를 만나러 케냐에 갔을 즈음에는 건강까지 급속도로 악화되어 사촌오빠의 등에 엎혀 작은 시골마을의 응급실을 들락날락 하기도 했고, 곧장 한국에 돌아와 수술대에 눕는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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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비아에서 찍은 사진들>


요약하자면 무대책 퇴사 이후 내가 얻은 깨달음은 크게 두 가지였다. 나를 조금 더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건강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누군가에겐 고작 퇴사가지고 유난인가 싶을 수 있겠지만, 내게는 돌이켜보면 살면서 이토록 무모한 짓을 해본 적이 없나 싶을 정도의 큰 결심이었고, 난생 처음 입원과 수술이란 것을 해보며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지를 체감했다. 병실에 누워 올려다보던 갈매기 무늬의 차갑던 천장과 수액걸이, 그리고 주사 바늘에 찔려 여기저기 피나고 멍들어있던 초라한 내 양 팔을 바라보며 느꼈던 무력감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건강을 회복한 나는 다시 취준생 모드로 돌아가 이곳저곳 지원했다. 예상은 했지만 결과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재직 시절 MD로 근무했던 나는 하루 평균 50통의 전화를 받을 정도로 온종일 전화에 시달렸는데, 회사를 벗어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휴대폰이 쉬이 제 기능을 해주지 않았다.


스타벅스에서 어김없이 자소서를 쓰던 어느 날, 국제전화 한 통이 왔다. 당연히 스팸이겠거니 받지도 않고 전화를 넘겼는데 문득 몇 주전 별 생각없이 지원했던 한 회사가 스쳐갔다. 어느 덧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었기에 현실적인 여건들을 고려해 해외 근무는 크게 선택지에 없었으나, 업무기술서상 딱 내가 해왔던 업무고, 지역이 두바이라는 점도 흥미로워 무심결에 지원한 곳이었다.


사실 아프리카 여행에서 비행편 때문에 두바이를 경유해야했기에 예정에 없이 4박 정도 머물렀었다. 여행 전에는 큰 감흥이 없었으나, 며칠 머물면서 한 번 살아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인도인들이 많다는 것이었는데, 이유는 과거 내가 거주했던 해외 국가가 '인도'였었고, 나에게 두바이의 첫 인상은 '발달한 인도'였기 때문이다.


약 한 달 간의 프로세스를 거쳐 최종 오퍼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두 번 다시는 꿈도 못꿀것 같았던 해외취업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처음 10분 간은 이메일을 받고 날 듯 기뻤으나, 기쁨도 잠시였다. 이내 갖가지 걱정이 물밀듯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 나이에 점점 나이 들어가시는 부모님을 두고 다시 머나먼 타국으로 가서 산다니, 불효도 이런 불효가 있을까? 나 벌써 30대 중반에 접어드는데 결혼은 언제해? 누구랑? 친구들은 대부분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나가고 사회적으로도 자리 잡아 가는 시기에 나는 친구도 하나 없는 타지에 또 나가서,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한다고?


심지어 조바심에 너무 성급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일부 선배, 친구들도 걱정어린 시선들을 보내왔다. 나 또한 내 선택에 확신이 없었다. 기쁨보다는 슬픔과 불안감이 나를 압도했고, 한국을 떠나기까지 4주 간은 하루에도 수 십번 변하는 내 감정을 가까스로 추스리며 급하게 준비를 해 떠나왔다.


그렇게 1년 9개월이 지났다. 나는 새로운 이 곳에서 아직도 불안하고 불완전하다. 떠나오기 전 스스로에게 질문했던 것들에 대해서도 아직 답을 얻거나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도시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전반적으로 두바이를 좋아한다. 그 어느 곳보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다이나믹한 멜팅팟(melting pot), 한국 이상으로 빠른 배달, 무더운 더위가 지나면 무려 4,5개월씩이나 지속되는 가을 날씨, 전반적 물가는 비싸지만, 식자재 비용은 한국과 비교해도 저렴한 편인 점 등등...


그렇지만 동시에 내게 있어 두바이는 꽤나 외로운 도시다. 가족 단위로 정착한 사람들도 있지만 바짝 돈을 벌어 고국으로 돌아갈 목표로 온 사람들도 많다.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는 그 화려함을 위해 고용된 수많은 사람들이 각개전투하며 밤낮으로 바쁘게, 50도에 달하는 숨막히는 더위를 견뎌내며 근무하기도 한다.


부유함의 상징이 된 듯한 두바이의 한 켠에는 외국인 노동자의 신분으로 그 어느 곳과 다르지 않게 소소하게 살아가는 나와 같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언제까지가 될 지 모르겠지만 이 곳에서 살아내는 소중한 하루하루를 더 늦기 전에 기록해보자는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