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직장생활 1년 6개월 만의 쾌거
지난 2월 20일부터 22일까지 전사 워크숍이 있었다. 우리 회사는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마케팅 테크펌인데 전 세계에 곳곳에 지사들을 두고 있다. 그중에서 내가 속해있는 런던 지사는 뉴욕 다음으로 큰 오피스이고 전체 유럽을 다 포함하는 '유럽의 본사' 같은 곳이다. 일 년에 두 번, 유럽의 직원들을 모두 런던 오피스로 초대해 크게 행사를 하는데, 이번 행사는 지난해 매출이 워낙 좋았던 터라 모두가 기대로 들떠있었다.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원래 먹을 것에 진심인 회사로 유명하긴 했지만 첫째 날부터 사무실에 DJ가 왔다. 온갖 종류의 음식과 술이 끊이지 않았다.
두 번째 날에는 더 큰 파티가 있을 거라는 공지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전날까지 장소를 알려주지 않았다. 애매하게 '운동화 금지'라는 힌트만 받아서 대충 집에 있는 원피스를 챙겨 입었다. 지금껏 웬만한 행사나 파티는 사무실을 꾸며서 했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이게 웬걸, 당일에 발표된 베뉴는 무려 런던의 '자연사 박물관 Natural History Museum'. 장소 빌리는 데만 억 소리 나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진짜 여기에 간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더 꾸밀걸 그랬다.
우리 회사의 시그니처 컬러는 블루 컬러인데, 자연사 박물관에 도착하니 온통 블루 조명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직원들 모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어안이 벙벙했다.
자연사 박물관은 천장에 달려있는 큰 공룡이 시그니처인데, 이 전체 홀을 파티 장소로 빌렸고 클럽처럼 음악이 나왔다. 그리고 나중에는 밴드가 와서 모든 노래를 라이브로 불렀다. 아니 크리스마스 파티도 아니고, 2월 수요일 저녁에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정말 완벽한 서프라이즈였다.
저녁 10시, 모두 신나게 춤추고 알딸딸하게 취했을 때쯤 Sales Awards Night를 시작하겠다는 방송이 나왔다. 각 사업부 별로 베스트 어카운트 매니저에게 상을 주는 이벤트였다.
쉽게 말해서 우리 회사는 디지털 마케팅 관련 플랫폼을 기업 고객들에게 팔아서 돈을 버는 SaaS (Software as a Service, 서비스형 소프트웨어) 회사이다. 즉, 최대한 많은 기업들이 이탈 없이 우리 회사 플랫폼을 써야 돈을 버는 구조이다. 그래서 우리 회사의 핵심 인력들은 어카운트 매니저들이고 클라이언트(어카운트)들과 꾸준히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의 계정을 관리해 주고 궁극적으로는 계속 우리 회사의 상품을 쓰도록 만드는 직무이다. 한마디로 회사에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서 이 Sales Awards는 어카운트 매니저들을 위한 상이고 회사에 가장 큰 벨류를 가져다준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올해의 영업왕' 같은 상이었다.
나도 그 '회사에 돈을 벌어다 주는 팀' 소속으로 광고주 어카운트 매니저이다. 영국과 유럽의 큰 규모의 리테일러/브랜드들이 내 클라이언트들이다. 솔직히 기대를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2023년에 성과가 좋기도 했고 솔직히 나보다 열심히 일한 사람은 없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친한 동료는 심지어 '네가 안 받으면 대체 누가 받냐'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정말 열심히 했다. 그래도 기대 안 하려고 최대한 애를 썼다. 최근에 회사에 배신 비슷한(?) 것을 받기도 했고 기대한 만큼 실망도 크니까.
그런데 거짓말처럼 내 이름이 불렸다. 모두들 손뼉 치며 환호해 주었다. 수백 명 앞에서 이런 상을 공개적으로 받았던 적이 내 인생에 있었던가? 아마 이게 처음인 것 같다. 얼떨떨하고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정말 행복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동료들의 격한 환호성에 기분이 짜릿했다. 내 매니저는 무대 앞에서 마치 딸의 재롱 잔치를 보는 엄마 마냥 흐뭇하게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I'm so proud of you"라고 하며 나를 안아주었다. 무대를 내려와서도 수많은 동료들의 칭찬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모두가 진심을 다해 축하해 준다니,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다음날 링크드인에 소식을 전했다. 그냥 자랑 겸 기록하고 싶어서 올린 글이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축하 댓글을 달아주었다. 가장 뿌듯했던 점은, 클라이언트들의 축하 댓글이었다. 모두 내가 상을 받을만하다며 축하한다는 댓글을 달아주었다. (그들은 영국에서 이름만 대면 모두가 다 아는 큰 광고주들이라 그들의 목소리는 나의 커리어에 나중에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또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퍼블리셔들의 축하 메시지였다. 나는 광고주 담당이라 퍼블리셔들과는 업무적으로만 연결되고 자주 만날 기회가 없는데도 이 소식을 기꺼이 축하해 주었다. 영국의 큰 신문사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Vogue, GQ 등 굵직한 매거진들의 모회사인 Conde Nast (콘데 나스트)의 디렉터까지 "Well Deserved!"라고 댓글을 써준 것을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광고주들을 관리하면서도 퍼블리셔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는데 그동안의 노력이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이 회사에 입사한 지는 1년 6개월 차, 영국에 온 지는 정확히 2년 만이다. 2022년 2월 23일에 처음 런던 땅을 밟았는데, 2024년 2월 22일에 영국에서 모든 현지인들을 제치고 '영업왕'이 되었다. 2년 전만 해도 그냥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는데, 이제는 저런 굵직한 글로벌 기업들과 일을 하고 관계를 맺는 사람이 되다니... "엄마!! 나 출세했어!!" 소리가 절로 나온다. 사람 인생이 2년 만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신기하면서도 뿌듯하고 또 감사했다.
내 인생을 통틀어 또 다른 터닝 포인트인 순간이다. 늘 그래왔듯 묵묵히 열심히 일하면서도 겸손은 조금만, 지금보다 더 자신감 있게 영국에서 직장 생활 잘해나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한테 꼭 얘기해주고 싶다. 그동안 정말 정말 고생 많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