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치는 내가 지키는 것
꽤 오랜 시간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내부 이직 준비는 내가 자발적으로 지원 포기 선언을 하며 허무하게 끝이 났다. 내가 있는 팀은 세일즈 팀이다 보니 매출 달성에 따른 성과급과 보너스가 있어서 다른 팀에 비해 연봉이 높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케팅 팀으로 옮기고 싶어 최소한 기본급이라도 올리는 조건으로 그 팀과 협상을 했고, 그 정도는 문제없을 것 같다고 해서 공식으로 지원을 했던 것이었다. 전략을 세워서 발표하는 면접을 위해 일주일 정도 주중 저녁, 주말 모두 반납해 가며 열과 성의를 다해 준비했고 다행히 만족할 수준으로 잘 끝냈지만, 다른 외부 후보자들도 있어서 그들이 동등하게 면접 프로세스를 끝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기다림의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3주쯤 지나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는데, 나와 함께 최종 후보자로 올라간 사람의 희망 연봉이 나와 큰 차이가 난다며 팀에서는 그 수준으로 다시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비슷한 수준으로 희망 연봉을 낮출 의향이 있냐고 물었다.
정말 황당했다. 연봉 차이는 무려 만 파운드, 한화로 약 1800만 원이었다. 아무리 회사는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라지만, 이렇게 연봉을 후려쳐도 되는 건가 싶었다. '너희라면 이걸 받아들이겠냐?'라고 진지하게 되묻고 싶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된다고 말을 하질 말지, 그동안 인터뷰 준비에 들인 시간과 노력이 모두 헛된 것처럼 느껴져 정말 화가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연봉을 그 정도까지 낮추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계속 마주칠 사람들이라 감정적으로 대하기보다는 그냥 깔끔하게 포기한다고 밝혔다.
그 이후 생각보다 빨리 마음을 정리했고 지금은 오히려 후련하다. 현재 팀에 남아 다시 한번 새로운 기회를 노려볼 생각이다. 그동안 이직 준비를 하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는데, 구직과 연애가 정말 많이 닮아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혀 다른 두 가지에서 공통점을 발견한 나도 웃기지만)
쎄할 때는 직감을 믿자
지원 전에 정보를 얻기 위해 같은 직무에 2년 반 있었던 동료와 커피챗을 한 적이 있었다. 직무와 관련한 기본적인 질문이었는데도 그 동료의 대답이 영 시원치 않았다. 본인의 KPI가 뭔지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고, 그녀가 매일 하는 일은 오히려 우리 팀이 하는 일과 비슷했다. 우리 회사의 마케팅 팀은 성과급이나 보너스가 없다. 비슷한 일을 하는데 경제적인 보상이 다르면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공고에 쓰여있던 책임이나 업무들은 대부분 하이어링 매니저가 하고 있는 것 같았다. Manager 역할이어서 내가 리드할 기회가 많을 줄 알았는데 그녀와 대화를 하고 나니 그럴 가능성이 적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 팀으로 옮기게 되면, 현재 팀에서 클라이언트를 상대하며 겪는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 줄어들 것 같았고, 롤 자체는 나중에 다른 회사로 이직할 때 더 성장 기회가 많을 것 같아서 지원하기로 했던 것이다. 마케팅은 예산을 잘 관리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연봉 협상에서부터 저렇게 쪼잔하게 구는 것을 보니 내가 마케터로서 할 수 있는 폭이 제한적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포기하고 나서 보니, 지금 팀에 있는 것이 훨씬 낫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처음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나 만나는 동안 종종 '이게 맞나?' 싶을 때가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계를 지속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서 그냥 무시하고 지나친다. 하지만 그 문제가 결국에는 연애 중 다툼의 원인이 되고, 심하면 이별의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한다. 상대방에 대한 마음이 간절해도, 쎄한 기분이 들 때에는 한 번쯤 의심해 보고, 직감을 믿어보는 것도 괜찮은 예방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 원하는 게 뭔지 확실히 알자
구직이든 연애든 내가 분명한 기준을 갖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연애 관련한 글에서 늘 누누이 강조한 부분이기도 하다. 나의 경우에는 희망 연봉을 낮춰줄 수 없겠냐는 말에 다시 한번 내가 이직을 하려는 이유가 뭔지, 앞으로 커리어에서 원하는 게 뭔지 진지하게 고민을 해봤다. 브랜드 쪽에서 줄곧 일했고 브랜드 전략이 내 주 전공이기 때문에 다음 스텝은 브랜드 인하우스 마케터라고 생각했다. 면접 준비를 하면서 처음 B2B 마케팅에 손을 대보았는데 내가 그동안 해왔던 B2C와는 또 결이 달랐다. 확실히 나는 소비자들 가까이서 어떻게 제품을 잘 보여줄지 고민하는 게 훨씬 재밌다. 내가 이직을 하고 싶은 이유는 인싸들만 빛나는 이 업계에서 내향인으로서 계속 억지로 가면을 쓰고 일해야 하는 스트레스 때문이었는데, 사실 '브랜드 마케터'라는 관점에서 보면, 현재 팀에서 굵직한 브랜드와 리테일러를 클라이언트로 두고 일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 힘들어도 당분간은 좀 참고 세일즈 팀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얻을 수 있는 배움에 더 집중해 보기로 했다.
연애에서도 '이상적인 파트너'에 대한 나만의 확실한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오히려 상대방에게 휘둘리기 쉽다. 내가 원하는 것을 들여다보지 않고 '상대'라는 존재에만 집중하다 보면 그것이 집착으로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한 기준이 확실한 사람은, 상대방이 그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면 바로 미련 없이 떠날 용기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은 관계에 있어서도 엄청난 힘이다.
서로의 우선순위가 다를 뿐이다
구직이나 연애에서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으면 누구나 먼저 스스로를 자책하게 된다. 특히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면 상대방보다 내가 어딘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 실력이나 자질은 이미 초기 면접에서 충분히 검증된 상태이기 때문에, 최종 면접은 결국 '가치'와 '우선순위'의 싸움이다. 나도 이번 프레젠테이션 면접을 끝내고, '이보다 더 잘할 순 없다'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연봉을 낮춰줄 수 있겠냐는 인사팀의 말에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했었다. 내부 지원자는 이미 회사와 제품을 잘 알고 검증이 된 사람이기 때문에 별도의 교육 없이 바로 업무에 투입이 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많은 회사들이 선호하는 편이다. 하지만 결국 팀은 내부 지원자가 가져다줄 수 있는 가치보다는 낮은 연봉을 선택한 셈이다. 지금은, 이건 누가 더 우수하거나 못난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단지 서로의 우선순위가 달랐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 팀의 우선순위는 예산 범위 안에서 최선의 후보자를 채용하는 것이었고, 나와는 생각이 달랐던 것이다.
모두가 본인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다. 상대방이 나와 이별하고 다른 사람을 선택했다고 해도 내가 그 사람보다 못나서가 절대 아니다. 단지 상대방의 우선순위에는 내가 없었을 뿐이니 자책하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런 경험을 통해 양쪽 모두가 서로의 우선순위가 될 수 있는 더 나은 관계를 얻게 될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내 가치는 내가 지키는 것이다
지원 포기하기로 공식적으로 이메일을 보내고 나서 바로 매니저와 면담을 했다. 'I'm sorry things didn't turn out the way you wanted.' 라며 운을 떼던 그녀는, 내년에 우리 팀에 있을 새로운 프로젝트를 언급하며 내가 더 재밌게 일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더 심어주었다. 사실 이번 지원 과정 내내 매니저는 예상외로 나를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었는데, 그때마다 '너를 다른 팀에 보내야 한다면 정말 슬프겠지만, 네가 원하는 대로 잘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해주곤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Senior Vice President(SVP), 즉 우리 매니저의 상사와도 1:1 면담을 했는데, 그녀는 내가 세일즈 팀의 핵심 멤버라며, 모두가 나와 일하는 것을 좋아하고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문득 이렇게 지금의 팀에서 인정을 받고 일을 잘 해내가고 있는데 괜히 내가 스스로에게 한계를 둔 것은 아닐까 생각을 했다. 사람의 마음은 정말 한 끗 차이다. 처음에 그렇게 간절했는데 지금은 다시 원래의 팀에 돌아오게 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을 기회로 내 가치를 진정으로 알아주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 가치는 내가 스스로 인정하고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 예시는 연애에도 적용할 수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내가 늘 주눅이 들고 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드는, '독이 되는 연애'를 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를 어떻게든 회복하고 싶다는 마음에, 행복했던 기억만을 떠올리며 그 관계가 나를 서서히 병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나도 모르게 그 독을 입에 머금고 살았던 기억 말이다. 지금 돌아보면, 나도 나의 가치보다 상대방의 가치에 더 초점을 맞췄던 적이 있었다. 상대와 멀리 떨어져, 비로소 내 가치를 되짚어보고 내가 상대로부터 어떤 말이나 행동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판단했더라면, 의외로 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상대를 간절히 원한다고 느끼더라도,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오히려 전혀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내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하거나,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과는 멀어지는 편이 결국 나에게 더 좋은 선택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마음속에 새겼으면 한다.
원래 남자친구에 대한 공공연한 자랑은 피하는 편이지만, 그의 메시지가 이 글의 핵심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 공유해보려고 한다.
우리를 파트너로 두는 사람, 혹은 팀원으로 두는 회사는 엄청난 행운이다.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주고 감사해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는 것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