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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해서 더 아픈, 반복되는 폭력의 일상

Princesse, 불어로 '공주'라는 제목에서 으레 기대되는 미녀와 화려한 드레스, 대리석 궁전은 이 영화에 없다. 회칠한 벽과 위태로운 선율로 기억되는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면, 허름한 오두막이 나타나고 한쪽 얼굴이 흉터로 일그러진 여인이 정체도 알 수 없는 음식을 요리할 뿐.  


두 명분의 그릇을 세팅하고 홀로 창밖을 보는 여인의 무표정한 얼굴과 창밖에서 그녀를 훔쳐보는 시선이 교차되며 묘하게 긴장되던 분위기는 공포의 실체(늑대)가 나타난 순간 깨진다. 


여기까지 봤다면 누구든 여인이 그녀를 다치게 한 바로 그 늑대의 감시 탓에 오두막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유추할 수 있을 터. 우악스럽게 짖어대는 늑대를 피해 침대 구석으로 옮겨간 여인이 보는 책 제목이 바로 Princesse다. 


갑갑한 현실의 돌파구로 Princesse 소설책 속 해피엔딩을 꿈꾸는 그녀지만, 애석하게도 오두막을 찾는 건 멋진 사내인 척 눈속임한 늑대다. 둘 사이 무미건조한 식사시간이 지나고 'DOG'와 'GOD'라는 글씨가 찍힌 술병을 사내가 연신 비워내면 여인은 사내가 가져온 토끼사체를 요리하다 원치 않는 관계를 맺는다. 


실사 영화나 색채가 있는 애니메이션이었다면 몹시 폭력적으로 비쳤을 장면은 흑백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라는 영화의 특성상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표정 변화나 대사 없이 인물의 행동만 비춰지는 데다 흑백 영화라서 '달아날 수 없어 포기해버린, 반복되는 폭력의 일상'을 살아가는 여인의 내면이 더욱더 날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 


특히 동의하지 않은 관계의 밤이 지나고 홀로 눈을 뜬 여인이 익숙한 듯 요리하고 청소하는 장면, 늑대가 짖어대는 창가에 체념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Princesse 소설책을 꽉 안고 있는 모습에서 무기력하지만 실낱같은 희망 만은 놓지 못하는 마음이 오롯이 보여진다. 식탁에 앉아 소설의 결말 Happy Forever 까지 보고 첫 페이지로 돌아가 다시 읽는 모습은 처연하기까지 한데, 우리를 또 한번 숨 막히게 하는 건 사내가 데려온 또 다른 여자다. 


언제나처럼 술에 취한 사내의 욕정이 펼쳐지는 동안 죽은 건지 산 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식탁에 방치되었던 여자는 정신을 잃은 상태로 사내에게 범해지고, 폭압의 밤이 지난 뒤 오두막에 남은 두 여인은 몹시도 닮은 서로를 바라본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며 함께 차를 마시고 Princesse 소설을 함께 읽던 평온한 일상은 사내의 방문으로 다시 깨어지지만, 이제 두 여인은 술에 취해 사내가 일방적으로 범하는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 


두 여인은 어떤 결말을 만나게 될까. 술에 취하는 순간 DOG(개)가 되어 오두막의 GOD(신)이 된 양 여인들을 폭압하고 제멋대로 유린하는 사내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일상화된 폭력과 당하는 이의 감정선을 담담하게 그려 더 아릿한 영화 Princesse, 결말은 이쯤에서 아껴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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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it.ly/3fRRRw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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