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장사익의 ‘꽃구경’이란 노래를 듣게 되었다. 국악과 대중음악이 섞인 멜로디와 옛 고려장 이야기를 가사로 구성한 노래였다. 얼굴도 모르는 가수의 목소리에서 고단함이 느껴지기에 여운이 남는 노래였다. 부모와 자식의 작별 인사를 꽃구경이라는 단어로 함축시킨 듯했다.
문득 나의 엄마가 생각났다.
"이제 뼈마디가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한 거 보니까 오래 고생 안 하고 일찍 죽었으면 좋겠다."
이제 막 환갑이 지난 엄마는 종종 자식 앞에서 일부러 들으란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소리가 꽤 듣기 싫었다. 그래서 어깃장 부리듯 매번 매몰차게 맞받아쳤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다 그랬어. 내가 엄마보다 먼저 죽으면 장기 기증해 줘. 건강한 장기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증해."
엄마는 나쁜 년, 못된 년 하면서 나를 째려봤다. 비싸기도 한 브랜드 홍삼이며 몸에 좋다는 건강즙과 제철 음식을 꾸준히 챙겨 먹으면서 죽는 타령을 하는 게 얼마나 모순적인 일인가 말이다. 엄마가 살아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나, 음식을 해 주면서도 엄마가 살아 있을 때나 해 줄 수 있는 거라며 협박 아닌 협박 같은 대사를 습관처럼 반복하는 걸 듣다 보면 진짜 화가 났는데 이제는 너무 들으니까 그러려니 한다.
엄마는 홀로 한 살 터울의 남동생과 나를 키웠다. 내가 갓 스물이 되었을 때, 엄마는 보험증권을 장롱 안 첫 번째 서랍에 정리해 뒀으니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챙기라는 말을 지나가듯 했다. 그때의 나는 ‘무슨 일’이란 말이 엄마가 ‘죽으면’이라는 말로 들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는 우는 나를 보면서 그게 무슨 울 일이냐면서 혀를 끌끌 찼다. 삶의 현실적인 무게를 알 만큼 알게 된 마흔이 가까운 지금 그 말을 들었다면, 그 ‘무슨 일’의 다양한 변수를 가늠하면서 보험증권을 방패 삼아 경제적인 문제의 위안거리로 삼았을 것이다. 남편이 없는 엄마가 채우던 가장의 자리가 혹여라도 비게 되는 상황이 오면, 맏딸이자 맏이로서 엄마의 자리를 채워 이성을 가지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게 될 것이므로 엄마로서는 당연히 미리 해 두어야 할 말이었을 것이다. 부모와의 작별을 염두에 두면서 사는 자식이 몇 이나 될까. 하지만 서로 그 말을 하는 것이 아프고 힘들다는 이유로 준비되지 않은 작별을 어느 순간 눈앞에 두게 되는 건 아닐까.
늘 엄마에게 해 두는 말이 있다.
"엄마가 죽으면 제사 지내준다고는 약속 못하고 엄마가 살아있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게. 죽고 난 다음에 제사음식 차려놓고 절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어차피 산 사람 입으로 다 들어갈 건데. 엄마가 진짜 왔다 가는지도 모르잖아."
대화의 분위기를 무겁게 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우스꽝스럽게 농담하듯 말하지만,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에는 진심을 담아 힘주어 말한다.
가끔 엄마의 장례식장에 상복을 입고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곤 한다. 회한이 남지 않은 눈물을 흘리는 딸이 되자고 매번 곱씹는다. 그 장면을 상상하면 엄마에게 매 순간 조금씩 너그러워진다. 엄마가 죽으면 묘를 쓰지 말고 화장해서 예쁜 나무 아래에 묻어 달라는 말이나 아파서 병원에 드러눕게 되면 인공호흡기 달지 말고 보내달라는 말이나 지나가듯 하는 작은 말이라도 귀담아듣게 된다.
내가 결혼하고 6년이 지나도록 아이 소식이 없자 정작 엄마보다 이모들이 출산과 양육의 과정을 건너뛰고 있는 내가 무슨 큰 결핍이 있는 듯한 뉘앙스로 말을 할 때가 있었다.
큰 이모는,
왜 아이 안 가지니? 그래도 나중에 늙어서 아프고 그러면 옆에 있어 주는 자식 하나는 있어야지.
둘째 이모는,
키울 때는 힘들어도 키워 놓으면 의지 되고, 아프면 병원에도 데리고 다니고, 죽으면 장례도 치러 주고 할 거 아니냐. 결혼했으면 자식 하나는 낳아야지.
이모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부모가 자식을 낳아 양육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점을 갖게 된다.
'자식이 노후 대비를 위한 보험인가?'
겉으로 표현하는 레퍼토리는 조금씩 바뀌지만, 근본적인 핵심은 ‘늙어서 어떻게 할래?’이다. 물론 엄마와 이모들이 가진 부모와 자식에 대한 유교적 가치관이 일반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다. 엄마의 부모 세대가 가족들의 수발을 받으며 집에서 죽음을 맞았다면 엄마와 나의 세대,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세대는 요양보호사의 병간호를 받으며 요양병원에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이 또한 모두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그런 흐름으로 흘러가는 모양새다. 할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에 집에서 돌아가셨고 집에서 장례를 치렀다. 하지만 할머니는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이 있어도 요양병원에서 홀로 외로이 돌아가셨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식들이 뒤늦게 요양병원 장례식장에 모여 차갑게 식은 할머니의 시신을 염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다. 할머니의 노후가 이모들이 나에게 말한 ‘자식과 부모의 노후’에 부합된 면이 있는지 할머니의 자식들에게 묻고 싶다.
나와 남편은 자식이 없는 노후의 삶에 대해서 걱정해 본 적이 없다. 걱정보다는 현재에 충실하면서 다가올 또 다른 현재에도 충실 하자는 편이다. 일부러 자식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병원까지 다니면서 가질 생각도 없다. 내가 출산과 양육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이 주는 기쁨이랄지 든든함이랄지 등등의 것을 짐작할 수 없지만, 나의 노후를 위해서 자식을 두고 싶지는 않다. 내가 만약 늦게라도 아이를 낳게 된다면 나의 주된 양육의 목적은 ‘자식의 건강한 독립’이 될 것이다. 자식에게 끊임없는 부양의 의무와 책임을 지우고 싶지 않다.
작년 겨울에 엄마가 오른 어깨 수술을 하게 되는 바람에 두 달간 팔을 움직일 수 없어서 혼자 씻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주말마다 내가 엄마 집으로 가서 목욕을 도왔는데 어릴 때 엄마가 때를 밀어주던 생각이 나서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싶어 서글픈 웃음이 났다. 엄마는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들을 쉴 새 없이 늘어놓다가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딸 없는 엄마들은 이럴 때 어쩔까 싶다. 그래도 딸이 있으니까 와서 목욕도 시켜주고 하지, 아들은 또 이렇게 못하잖아. "
엄마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한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딱 잘라 말했다.
"엄마! 딸이 없었으면 또 딸이 없는 상황에서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거야. 목욕탕에 가서 팔에 비닐 감고 때밀이 아줌마한테 목욕하는 방법도 있잖아. 딸, 아들이 있고 없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래, 너 잘났다!"
엄마는 내가 냉정하게 말할 때면 꼭 입을 삐쭉거리면서 볼썽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난 또 그게 엄마가 철이 없는 것 같이 느껴져 어처구니가 없다가도 웃겼다.
"엄마 팔 좀 움직일 수 있고 날씨 따뜻해지면 봄 꽃구경하러 가자."
"정말? 너무 좋지! 어디로 가지?"
엄마는 그렇게 토라졌다가도 금세 기분이 풀렸다.
그리고 따스한 봄의 어느 날, 엄마와 함께 수목원으로 꽃구경을 다녀왔다. 엄마와 자식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그 순간이, 꽃구경의 ‘진짜 의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때 놓친 후회보다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과 진심이 더 값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