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요가 수련을 마치고 카톡을 확인하려는데 알림 설정을 꺼둔 단체 대화방의 수신 메시지가 300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나를 포함해 총 4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대화방인데 20대 후반, 사회에서 만나 벌써 10년 가까이 된 인연들이다. 잘 지내고 있냐는 안부 인사를 시작으로 모임 약속을 정하거나 시시콜콜한 일과 공유하기 등의 내용으로 메시지가 작성되고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바로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친구들의 직장 동료 험담부터 각자 먹은 오늘의 점심 메뉴 따위가 딱히 궁금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늘 늦은 오후쯤 메시지의 알림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면 확인하곤 했다. 어쩔 땐, 하루가 지나 확인하고 짧은 답을 할 때도 있다. 나머지 친구들이 합의를 본 모임 날짜와 시간이 나의 일정에 크게 영향이 없으면 짧게 ‘오케이’하는 식이었다. 4명 모두가 좋은 시간과 날짜를 맞추려면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두 달 전에는 미리 만날 날짜를 정해야 하는 터라 약속이 정해지면 쉽게 깨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한두 달 사이에도 일이 생기기 마련인데, 어느 순간부터 관계 유지를 위해 분기별로 의무적인 만남을 갖는 느낌이 드는 이 모임이 조금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단체 대화방에서 나눈 수다도 부족한지, 모임 전날 약속을 다시 확인하는 메시지의 끝은 매번 만나서 자세히 얘기하자는 걸로 마무리됐다.
이 친구들과의 모임은 분기별로 한 번씩 이뤄진다. 그러면 1년에 총 4번의 모임을 하게 되는데 생각보다 만남의 빈도가 높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학생 때야 시간이 여유로우니 시도 때도 없이 만나 놀거나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각자 먹고살기 바쁘다 보면 시간을 내는 일이 쉽지 않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3명의 친구는 말이 끊길 새 없이 에너지가 높은 편이고 그에 반해 나는 말을 하기보다는 듣는 경우가 많았다. 그 친구들에 비해 내가 가진 에너지가 낮은 탓도 있을 것이다. 나와 상대의 에너지 흐름이 맞지 않으면 대화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피곤한 일이 된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카페에 비집고 들어가 앉아 이야기하자 싶으면 시장 바닥 한가운데 있는 느낌이 든다. 주위 사람들의 대화 소리까지 합쳐지면 카페 안의 소음은 점점 커지고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목소리를 전달하려면 목청을 키워야 했으므로, 나중에는 대화하는 건지 소리를 지르는 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런 곳에 30분만 앉아 있어도 나는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졸음이 몰려온다. 한 자리에서 기본 4시간이 넘도록 쉬지 않는 친구들의 입은 시간 가는 것이 아쉬운 듯 더 빠르게 움직인다. 예능프로에서 패널들이 말할 타이밍을 절묘하게 노리는 것처럼 친구들의 대화에서 공백은 절대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보자면 나는 방송 분량을 챙기지 못하는, 미스 캐스팅된 패널인 셈이다.
이 모임에서 나의 듣기 실력이 나날이 발전해 가면 갈수록 나의 대화 참여율은 점점 바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단체 대화방의 메시지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은 대화의 내용이 그다지 흥미롭지 않을뿐더러, 시시껄렁한 농담들을 주고받는데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영화를 보거나 등산하거나 책을 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대화의 깊이를 선호하는 편이기 때문에, 내가 맺은 인간관계는 일대 다수이기가 어렵다. 나에게 유일한 일대 다수의 인간관계인 이 분기별 모임이 힘겹게 느껴진다는 건 아무래도 나에게 문제가 되는 일인 건 분명한 것 같다. 올해 마지막 4분기 모임이 지난주에 있었는데, 토요일 오후 1시에 만나 지하철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밥집, 카페, 술집까지 장소를 옮겨가며 장장 10시간의 수다가 이어졌다. 체력이 바닥난 나는 그 이튿날까지도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술도 안 마셨는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딱히 인상적인 내용은 없었나 보다. 침대에 누워 천장에 초점 없는 눈알을 굴려 가며 곰곰이 생각했다. 집에 잘 들어갔냐는 확인 메시지와 함께 10시간의 수다에도 시간이 부족해서 아쉬웠다는 그녀들의 말은 진심일까?
나는 나에게 물었다.
친구들이 불편한가?
그건 아니다.
머리가 굵어진 성인들이 사회에서 만나 10년이 넘게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조금씩 다른 성향을 지녔지만, 이렇게 친구가 된 데에는 서로의 사연에 대한 연민이 공통점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A 친구는 고등학생 때 부모를 교통사고로 한 번에 잃고 고아가 되었고, B 친구는 친모와 이혼한 아버지의 재혼으로 무시무시한 새엄마 밑에서 자랐고, C 친구는 나와 비슷하게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로부터 가정폭력을 겪으며 자랐다. 대략 이런 사연들을 가진 이들이 한 직장에서 만나 친구가 되는 확률도 높지는 않을 것이다. 나와 너무 다른 환경의 친구들과는 묘하게 이질감이 생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 친구들과는 정서적 소통이 편한 편이다.
그렇다면 왜, 이 모임이 부담스러운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졌다.
흘러가고 있는 우리의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이 이 시간을, 남을 욕하거나 속풀이 하는 것으로 안주 삼는 술자리로 채우지 말자.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아버지의 피가 반쯤은 섞여 있을 테니 술을 못 마시는 게 아니라 안 마시는 거다. 하지만 3명의 친구는 술을 좋아한다. 나에게 술을 강요하진 않지만, 주위가 시끄러운 술집에 앉아 나중에는 기억도 나지 않은 말들을 나누는 것이 곤욕스럽다. 차라리 그런 시간을 함께 수목원 숲길을 산책하거나 가벼운 등산, 전시회 관람하는 것 등으로 채워보면 인생이 좀 더 풍요롭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카톡 단체 대화방을 열어 이렇게 썼다.
<얘들아, 우리 내년 1분기 모임에는 일요일 아침 일찍 모여서 등산을 함께 해보는 거 어떨까? 둘레길 걷기도 좋고!>
메시지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메시지 앞의 숫자가 줄어들기를 기다렸다.
3... 2... 1...
<등산?>
<오! 괜찮은데?>
<좋은 생각이야!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동동주에 파전 콜?>
나는 동동주에 파전이라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툭 터졌다. 생각보다 친구들의 호응은 좋았다. 어느 산으로 갈까부터 시작해 동동주 맛집 검색까지 다시금 친구들의 단체 대화방 수다가 이어졌다. 등산으로 채워질 다음 분기 모임의 끝도 산 아래 파전집에서 동동주를 거나하게 마시면서 마무리될 것 같지만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이번에는 좀 기다려진다. 분기별 이 모임의 질을 높이기 위한 프로젝트를 기획해 봐야겠다.
프로젝트의 이름은 ‘슬기로운 모임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