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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hill Jun 03. 2024

두 번째 이별

10월의 마지막 날의 해가 서서히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11월을 코앞에 둔 서늘한 공기와 푸르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태양이 고개를 숙이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차가운 바람이 사람들의 볼을 간질이면서, 자연스레 집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시간도 더 빨라졌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추운 날, 밤까지 일하고 싶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태양의 붉은빛이 하늘에서 깨끗하게 씻겨 나가고 어두운 푸른빛이 다시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하자,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표정에는 기쁨과 흥분감이 서려 있는 듯했다. 마을의 길거리는 평소 이 시간대보다 더 많이 붐볐다.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이 각종 짐과 물건들을 들고 분주하게 걸어 다녔으며, 그들 중 일부는 독특한 옷을 입고 있었다. 손에는 주황색 호박에 검은 얼굴을 그린 듯한 바구니를 들고 있었으며, 거기에서 사탕을 꺼내서 먹고 있었다. 길거리의 가로등과 건물의 벽에는 유령과 괴물들의 그림이 그려지고 인형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날은 10월 31일, 바로 할로윈이었다.




어느덧 늦은 밤이 되자 하늘에서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던 태양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새까만 어둠이 마을을 덮었다. 셀로판지로 장식된 가로등이 뿜어내는 형형색색의 빛으로 거리는 물들였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과자를 씹어먹으며 마을을 돌아다녔고, 어른들 역시 화려한 코스튬을 입고서 파티와 술집을 드나들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가 일 년에 한 번만 누릴 수 있는 할로윈의 즐거움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웃음과 즐거운 비명으로 가득한 길거리에, 그 가장자리를 홀로 걸어가는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화려한 코스튬이나 사탕 뭉치도 없이, 검은색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가방을 멘 채 고개를 숙이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조용하면서도 미스터리한 모습을 흐리지 않은 채, 소녀는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를 떠나 마을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걷는 방향 앞에는 얼마 전 문을 닫은 병원이 초라하게 서 있었다. 몇 주 전 문을 닫은 병원의 주변에는 술을 마시는 젊은 청년들의 모습, 병원에 잠입해서 담력 시험을 끝낸 듯한 십대들의 모습 등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후드티를 뒤집어쓴 소녀는 그런 주변 모습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저 말없이 걷기만 했을 뿐이다. 병원의 깨진 유리문 사이로 다리를 집어넣고 들어선 그녀는, 마치 익숙한 듯 병원 복도를 가로질러 계단을 향해 계속 움직였다. 깨진 창문 사이로 스며든 은은한 달빛이 소녀의 얼굴 일부를 비추었는데, 소녀의 차가운 얼굴에는 미소 없이 무표정함만 남아 있었다. 이후 계단을 두 걸음씩 뛰어오르듯 재빨리 올라간 소녀는 병원의 두 번째 층에 다다르게 되었다. 두 번째 층에는 버려진 병실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소녀는 후드티를 벗어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소녀의 헝클어진 머리는 그녀의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으며, 입가부터 시작해 얼굴에는 생기가 별로 사려 있지 않았다. 그녀는 역시 병원의 구조를 잘 알고 있는 듯, 텅 비어 있는 병실들을 가로질러 맨 끝에 있는 낡은 병실로 걸어갔다. 병실의 문 앞에 선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병실에는 버려진 침대 한 구와 의자 하나만이 놓여 있었다. 벽장 같은 다른 병원 물건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단지 침대 위에 시든 하얀색 꽃 한 송이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소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술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으며, 메말랐던 눈가는 촉촉해졌다. 소녀는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이를 꽉 깨물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소녀의 감긴 눈 사이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나왔다. 소녀는 눈을 다시 떠 붉어진 눈시울을 드러내고는 침대로 걸어갔다. 침대로 걸어간 그녀는 앞에 놓인 의자에 앉은 후, 가방을 열어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 사진에는 소녀와 함께, 그녀와 닮은 여성 한 명이 찍혀 있었다. 소녀는 그 사진을 침대 위 꽃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어느 순간부터 소녀는 소리를 내면서 흐느끼고 있었다. 한 방울로 시작한 눈물도 어느덧 멈출 기미 없이 계속해서 소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소녀는 손을 얼굴로 가져가 눈물을 훔친 다음, 떨리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시작했다.




"미안해, 언니... 작년 언니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해서..." 소녀는 울먹이면서 말끝을 흐렸으나, 곧 말을 이어갔다. "언니가 너무 그리워.... " 마음이 아파왔는지 그녀는 말을 이어가기를 멈추었다. 소녀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언니를 본 것은 1년 전 이 병실이었다. 하지만 그때 놀란 소녀가 도착한 순간 언니는 몸은 이미 차갑게 변해 있었다. 그 이후 1년 동안 소녀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얼마나 홀로 울었던지, 소녀는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낡은 침대 시트는 소녀의 눈물에 젖어 있었다. 소녀는 얼마 전 울음을 그쳤으나, 마음과 몸이 지친 탓에 얕은 잠에 곧 빠져들었다. 밤하늘의 달이 서서히 약해지고, 밤이 지나갈 때까지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잠을 헤매고 있었다.




하늘이 다시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새벽녘, 소녀는 갑작스레 자신의 얼굴을 스치는 무언가를 느꼈다. 깃털만큼 약하고 희미했지만, 자신의 머리카락은 분명 아니었다. 새벽 바람이라기에는 너무 따뜻했으며, 무엇보다 그 느낌은 부드럽고 정중했다. 마치 사람의 손결처럼 말이다. 그 순간 잠에서 깬 소녀는 정신이 바짝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원의 방에는 여전히 자신 혼자였으며, 열린 창문으로는 전혀 바람이 불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 순간,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던 소녀의 귓가에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해."




그것은 방금 전 얼굴을 스친 느낌만큼 작고 희미했지만 분명 사람의 목소리와 언어였다. 그 짧은 순간 들린 한 마디에서, 소녀는 잊고 있었던 언니의 목소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에 다시 안정되었던 마음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고, 소녀는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주위를 계속 둘러보던 소녀의 시선이 마침내 다시 침대로 향했다. 침대 위에 올려져 있던 시든 꽃은 다시 살아나 있었다. 그 하얀색 꽃잎과 초록 줄기는 동화에서 나온 듯 깨끗하고 생생한 색조를 띠고 있었다. 꽃의 작은 잔줄기들은 사진 위에 올려져 있었다. 이 모습은 마치 꽃이 자신의 줄기로 사진을 껴안는 듯한 것처럼 보였다. 소녀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으며, 곧이어 그녀의 마음만큼이나 뜨거운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나왔다.




잠시 후 소녀는 하얀 꽃과 사진을 손에 들어올린 다음 창가로 걸어갔다. 태양이 다시 뜨기 직전의 하늘은 옅은 파란색이 새겨져 있었다. 소녀는 열린 창문 사이로 하늘을 높이 바라보았다. 언니가 준 마지막 이별 선물을 손에 꼭 쥔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언니에게 눈인사를 하듯, 소녀는 그 자리에 계속 선 채 하늘을 계속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새 태양이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할로윈은 끝났지만 소녀의 인생에는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었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이별을 마친 그녀에게는 특별한 순간이었다.






[수백 년 전, 아일랜드에서 시작된 풍습에서 할로윈은 유래했다. 그들에게 새해 첫날은 겨울이 시작되는 11월 1일이었는데, 그들은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1년 동안 죽은 장소 근처를 떠돌다가 사후 세계로 향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0월 31일은 특별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 할로윈의 기원과 관련된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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