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불은 존재했다 - 3화
어스름 밤바람이 동네를 한 바퀴 훑고 지나갔다. 쌀쌀한 마당 한 자리에 그림자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때마침 범명이 돌아온 것이다. 잠시 뒤 안채 창호지가 환한 전깃불로 밝게 물들었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문풍지 틈새로 들려왔다. 용례는 애꿎은 달력만 쓸어 넘겼다. 벽에 붙여뒀던 등록금 고지서가 팔랑이며 떨어졌다. 벽에는 고지서가 오랫동안 붙어있던 자국이 남아있었다.
굳은 표정의 용례를 바라보던 범명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선자 일이오?"
범명의 메마른 입사이로 쉰소리가 새어 나왔다. 창호지 너머로 겨울바람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자는 미용기술을 배우고 싶다는디요.."
"... 절대 안 될 일이여. 어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남사스럽게..."
범명이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곤 떨어진 고지서를 집어 책상 위에 조용히 올려두었다. 모질게 말은 뱉었지만, 그는 선자가 그토록 하고 싶던 공부를 다 하지 못하게 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올해 여름부터 시름시름하던 돼지들이 결국 겨울을 채 넘기지 못하고 집단폐사했다. 자식들의 먹을거리와 입을 거리, 배울 거리가 되어 줄 녀석들이었다. 용례는 범명의 기색을 살폈다.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잠든 선자를 불러다 앉혀놓고 밤새 훈계를 늘어놓았겠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입이 닫힌 빗장처럼 굳게 잠겨있었다.
'하필이믄 미용기술이여...'
요즘 도시 변두리나 군부대 근처에서 미용실 간판아래 퇴폐업소를 운영한다는 이야기가 전국에 파다했다. 그 때문에 동네 이발소나 미용실만 하더라도 오래된 곳이 아니고서야 장사하기란 여간 어려웠다. 그런데 이 와중에 미용사를 하겠다니.
'암만..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안되제.'
하지만 용례는 보았다. 제비꽃 같은 계집의 눈망울이 다시금 반짝이는 순간을. 미용기술을 익혀 금방 돈을 벌 수 있다며 들떠하던 선자를. 제 꿈이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꺾어졌어도, 금세 살아날 방도를 찾아 비집고 일어나는 그 짙푸른 생기를. 그러나 용례는 생각을 털어내듯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공부를 그렇게도 잘하던 모범적인 딸이 돌연 미용사를 하고 싶다는 것은 범명과 용례의 입장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범명은 잠시 잔기침을 하곤 신문을 넘겼다.
'저 도깨비불 같은 양반.'
오래간만에 집에 돌아와서는 선비처럼 신문이나 읽고, 바른 소리만 해대는 범명이 야속했다. 유난히 추운 올해 겨울이 못내 야속했다. 그가 또다시 먼 길을 나서야만 하는 그들의 살림살이가 야속했다.
"음-.. 그리고 이제 돼지는 접어야것응게, 물건을 좀 더 떼다 팔아볼라고."
신문을 넘기던 범명은 용례의 거친 손을 슬쩍 바라봤다. 흙 때가 잔뜩 낀 거뭇한 손톱. 장신구 하나 없는 투박하고 그을린 손. 그것은 범명이 부재했던 나날들이 얼마나 고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범명과 용례는 이 작은 마을에 굳게 뿌리내렸다. 범명은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던 곧은 사내였고, 용례는 인심이 후했던 여인이었기에. 이들 부부가 뭇 이야기 속에 오르내리던 어느 해에 결국 범명이 이장이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항시 겸손해야 하고, 나가서 잘못된 짓거리 하면 안 돼."
어김없이 불쑥 집으로 돌아온 범명은 아이들을 주룩 앉혀놓고 밤중까지 훈계했다. 졸린 눈을 벅벅 비비는 아이들을 방으로 보내며 범명은 마지막까지 당부했다.
"착하게 살아야 헌다."
***
그로부터 며칠 뒤. 폭풍우 치는 하늘이 온통 일렁이던 날. 이른 아침밥상 앞에 앉은 범명은 비몽사몽 한 선자의 밥그릇에 밥을 두 숟갈 더 퍼올려주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그는 물건을 떼러 갈 채비를 마쳤다.
"아부지, 조심히 다녀오세요."
"어매 말 잘 듣고, 공부 잘하고 있으라."
범명은 선자를 잠시 바라봤다. 맑은 눈망울이 그를 살폈다. 그는 어떠한 말 대신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그렇게 떠난 범명은 바람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계절이 지나 봄비가 내릴 무렵. 마을 사람들이 낡은 모자 하나를 손에 들고 이장댁을 찾아왔다. 겨우내 잠들어 있던 것들을 깨우려는 듯,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장대비에 온 산과 마을이 소란했다. 낡은 모자는 소금내가 짙게 베어있었다. 용례와 아이들은 쏟아지듯 빗소리를 내었다. 자꾸만 있다, 없다 했던 도깨비불은 더 이상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
복도 끝이 소란했다. 발소리가 병실 쪽으로 가까워졌다. 곧이어 병실 문이 열렸다. 엄마의 공허한 눈동자가 낯익은 얼굴에 멈춰 섰다. 똑똑-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병실을 울렸다. 도깨비불 같던 사내를 빼어 닮은 얼굴. 여자는 고개를 들어 엄마를 마주했다. 첫째 이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