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 물드는 변주곡(수필)

함박눈과 빗방울

by 산들강바람


창밖의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방금까지는 분명 세상을 하얗게 지우며 내려오던 함박눈이었다. 마치 누군가 하늘 위에서 커다란 솜사탕을 잘게 떼어 던지는 것처럼, 탐스러운 눈송이들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그 눈송이들은 제 몸집을 자랑이라도 하듯 느릿하게, 때로는 장난스럽게 춤을 추며 내려앉았다.


기묘한 것은 눈이 내릴수록 세상은 오히려 어두워진다는 점이다.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빽빽하게 메워지고, 대기는 습기를 머금어 묵직해진다. 하지만 그 짙은 어둠은 역설적으로 눈송이들을 더욱 빛나게 한다. 가로등의 노란 불빛 아래를 통과하는 눈송이는 보석 가루처럼 반짝이고, 어둠을 배경 삼아 떨어지는 하얀 궤적은 선명하다 못해 시리다. 눈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으면서도, 세상의 모든 어둠을 빌려 제 존재를 증명한다. 어둠이 깊을수록 눈송이는 더 크고 화려한 꽃으로 피어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소리도 없이 공기의 질감이 변한다. 함박눈의 폭신한 낙하가 멈추고, 창문에 '틱, 틱' 하고 부딪히는 단단한 소리가 들려온다. 눈이 비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눈송이가 비가 되는 그 찰나의 변주를 지켜본다. 화려하게 공중을 수놓던 하얀 결정체들이 힘을 잃고 녹아내리더니, 이내 투명한 물방울이 되어 떨어진다. 눈송이가 빛을 반사하며 자신의 형체를 과시했다면, 비는 그저 어둠 속으로 스며들 뿐이다. 눈이 내릴 때는 눈송이가 지나가는 길마다 하얀 선이 그어졌는데, 비로 바뀐 세상에서는 그 어떤 궤적도 보이지 않는다. 빗방울은 어둠에 물들어버린다.


어둠은 비를 삼키고, 비는 어둠을 닮아간다. 아까까지만 해도 빛을 받아 반짝이던 것들이 이제는 형태조차 가늠할 수 없는 투명함으로 돌아갔다. 빗방울이 분명 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지붕을 때리는 낮은 소리와, 창문을 타고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만으로 짐작할 뿐이다. 허공은 다시 텅 빈 듯 고요해지고, 눈송이가 비추던 그 찰나의 환상도 비와 함께 씻겨 내려간다.


우리의 삶도 때로는 이처럼 눈과 비 사이를 오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날의 우리는 함박눈처럼 화려하게 세상의 시선을 붙잡는다. 어둠이 깊을수록 나의 성취와 존재감은 더욱 빛나고, 사람들은 그 하얀 궤적을 보며 감탄한다. 하지만 또 어떤 날의 우리는 어둠에 물든 빗방울처럼 존재한다.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떨어지고 있지만,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그저 묵묵히 어둠 속을 관통할 뿐이다.


눈송이가 빛을 받아 아름다운 것이라면, 빗방울은 보이지 않음으로써 대지를 적신다. 눈송이가 세상을 덮어 일시적인 평화를 준다면, 빗방울은 어둠 속을 파고들어 뿌리를 깨우고 생명을 준비한다. 비록 지금은 어둠에 물들어 빗줄기조차 보이지 않는 막막한 밤일지라도, 그 비가 땅에 닿아 무언가를 적시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창밖을 다시 내다본다. 이제 눈의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짙은 어둠만이 창가에 머물러 있다. 빗방울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안다. 저 어둠 속에서 수만 개의 투명한 물방울들이 부지런히 내리며 세상을 씻어내고 있다는 것을.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한 젖음이 시작되고 있다.


함박눈의 찬란한 빛도 좋지만, 어둠 속에 숨어 묵묵히 내리는 이 비의 겸손함이 오늘 밤엔 더욱 깊게 다가온다. 눈송이가 남긴 하얀 기억 위에 차갑고도 단단한 비가 내려앉으며, 계절은 또 한 번 제 몸을 뒤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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