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이 오늘따라 유난히 경기를 일으키듯이 진동을 울리길래, 스팸 문자가 극성이구나 싶어 차단하려고 핸드폰을 들었는데, 이게 웬걸, 어제 썼던 글이 하루 만에 조회수 1만을 넘었다고 알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20개도 안 되는 제 글들 중에 이 글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조회수가 200도 못 넘는 제 브런치였기에, 1만이라는 숫자에 기쁨보다는 얼떨떨함이 앞섰었지만, 지금은 이제껏 어둡기만 했던 내 글 중에 이제야 많은 사람에게 읽힐 만한 글이 하나 써졌구나, 하며 기쁜 마음입니다.
제 글을 읽으러 와준 독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제 다른 글들도 읽고 감상해주시기를 바랍니다 :)
서두
나는 4학년이 되자마자 1학기 전체를 현장 실습으로 보내기로 했었다. 내 전공지식은 여전히 산발적이고 얕아서 실용적으로 써먹기엔 어딘가 부족해 보였고, 그렇다고 그 이론의 결핍을 모두 극복할 만큼의 실전적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어서, 나는 순전히 불안감으로 더럭 현장실습을 신청해버린 것이었다. 이론적인 지식은 적었지만 생명력과 의욕은 넘쳐났던 나였기에 실제 기업에서 일하고 배운다면 그때 축적된 경험들이 길을 찾는 내 눈을 트게 해 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판단 속엔, 운이 좋다면 그곳 담당자의 눈에 들어 정직원으로 채용될 수도 있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거의 망설임 없이 학기 현장실습을 신청했다.
물론 현장실습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첫 실습은 3학년 봄 방학중에 학교 기업에서 현장실습을 한 것이었는데, 그때는 명색만 실습이었지 실상은 공장의 생산 라인에서 하루 종일 제품 포장만 시키는 것이었어서 나는 그곳에서 특별히 무언갈 배운다던가 지식을 쌓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 나는 그곳에서 기업과 실습생 간의 입장차이만을 뼈저리게 체감했기 때문에, 이번 실습 중에도 그런 무의미한 작업만을 반복하다 학기를 마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기도 했었다.
개강 첫날, 내가 출근한 곳은 실험 센터였다. 그곳은 시판되는 식품 속의 균을 정량(균이 얼마나 있는지)하고 정성(균의 존재 유무)하는 실험을 하는 곳이었고 나는 그곳에서 주로 실험에 사용된 플라스크와 시약병들을 세척하고, 실험에 사용되는 기자재들을 충당해놓는 등의 실험보조를 맡게 되었다. 일이야 사실 아무리 좋게 봐도 '잡일'밖에 안 되는 일들이었지만, 사실장 공장 근무나 다름없던 저번 실습에 비하면 노동 강도도 훨씬 낮았고 또 주기적으로 실험 실습을 시키며 교육까지 해주었기에, 나는 이전에 비해 굉장히 만족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본문
금세 여유를 찾은 나는 눈을 들어 연구실 전반을 살피기 시작했다. 배양기들이 많아 항상 후덥지근했던 우리 연구실엔, 나를 포함해 3명의 실습생들이 같이 있었는데. 한 명은 나보다 3살이 적은 여학생이었고. 한 명은 나보다 한살이 적었지만 같은 학년이었던 P 양이었다.(이름 끝자가 '인'으로 끝나기 때문에 인의 원자 기호인 P를 따서 호칭함) P는 코로나에 걸려서 실습 첫 주엔 보지 못하고 2주 차 때부터 같이 일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파도치는 듯한 웨이브 헤어가 등까지 닿고, 마스크 위에 떠오른 눈이 크고 동그랬으며, 허스키한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던 여학생이었다. P는 출근한 그날부터 1주 동안 생긴 공백을 메꾸기라도 하듯, 부단히 노력했으며 먼저 일했던 내게 업무와 관련된 것들을 많이 물으면서도, 본인이 직접 실수해가며 배우는 열정을 갖고 있기도 했다.
업무 중일 땐 항상 열정적인 P였지만, 업무가 비어 가만히 앉아있을 때의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그 크고 동그란 눈동자가 끊임없이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굴러갔고, 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나 실습 일지를 쓰고 있을 때에도 연구원분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어김없이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곤 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면 뭐랄까 군 복무 중, 전입 온 지 얼마 안 된 신병을 보는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인정의 욕구가 이글거리는 열정이 있었지만, 낯선 곳에서 무엇에 손대야 할지 모르는 불안감이 서로 충돌해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그 모습 말이다.
나는 그런 P가 조금 안쓰럽기도 한 데다, 항상 열심히면서도 나는 물론이고 모든 이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P가 좋게 보이기도 해서 실습기간 동안 그녀를 좀 도와주기로 했었다. P가 실험실 내의 플라스크나 실험관을 깰 때면 나는 내가 깼다며 잘못을 덮어주기도 했었고, 유난히 축 처지는 날이면 초콜릿 등의 달달한 주전부리를 들고 와 나눠주기도 했었다. 사실 이건 내가 먹고 싶어서 같이 산 느낌이었다 나는 P 같은 사람은 조금의 적응기간만 주어져도 금방 자기 환경에 능숙해진다는 알고 있었기에, 마치 자전거를 처음 탈 때, 뒤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정도의 작은 성의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쨌든 P는 빠른 시간 내에 적응하게 되어서, 경계심을 한껏 풀어헤치는 환한 웃음을 보여주는가 하면,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농담하는 등의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긴장하지 않을 때의 그녀는 첫인상보다도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이었기에, 나는 내 노력과는 별개로 더 이상 긴장하지 않고 한껏 여유로워진 P를 보고 뿌듯해했다.
어느 한날 P는 연구원들과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일 생겼다며 묻는 내게 P는 별일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 여기 정직원 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얘기인 즉슨, P가 이곳의 실습이 너무 도움이 되어서, 실험 센터의 담당 센터장님께 연락하여(센터장님이 우리 학교 교수님이어서, P와는 아는사이)실습기간을 더 늘릴 수 없겠냐고 물으니 센터장님께서 그럴거면 차라리 정직원으로 일하라.. 라고 얘기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얘기가 실습 담당자에게까지 흘러들어가, P의 채용에 대해서 연구원들과 얘기가 오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처음엔 그 얘기에 놀랐지만, 어느새 속으론 수긍하고 있었다. P가 업무에 열심인 건 물론이고 이곳의 실험들에 학문적인 관심을 보이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이곳 연구원들이 P를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연구원들은 모두 여자라서 P를 대하기 편하게 생각하는 데다 P는 사근사근하기까지 해서 연구원들이 P를 특히 좋아한다는 걸 업무 간에 자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일에 있어선 나 역시 P 못지않은 능숙함과 뛰어난 일머리로 업무를 잘 소화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나는 남녀를 떠나서 대부분 사람들이 조금 어려워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작 P는 정직원 채용 가능성에 대해서 조금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침 같은 시기에 교수님에게서 서울의 직장 하나를 추천받아, 둘 중에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직장의 질을 따지자면 이곳이 인 서울에 비할 수 있겠냐만은, 그녀는 남자 친구와 떨어져, 낯선 곳에서 방을 구하고 월세를 벌어야 하는 생활에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내가 느꼈듯 그녀는 적응이 가장 어려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고민하는 P에게 조언보다는 첨언하는 느낌으로 말했다.
"어디든 네가 편하고 사람이 좋은 데를 가는 게 좋아, 직장의 질은 모르겠지만 여기는 최소한 사람(연구원분)들은 증명됐잖아. 사람이 좋으면 일이 힘들어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어, 추천받아서 가는데 괜히 낙하산이라고 험한 분위기에서 일하게 될 수 있잖아, 여기 있으면 최소한 자취방, 월세, 적응, 이런 문제들에서 완전히 자유롭겠지."
내가 이렇게 말하자 P는 긍정했다. P 역시 적응과 사내 분위기를 이유로 이곳을 권하는 내 말에 동의한 것이었다. 사실 내 첨언과는 별개로 P는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선택했을 테지만, 나는 그저 그녀가 적응을 이유로 서울에 들어가길 꺼려하는 마음을 공감해주었을 뿐이었다. 어쨌든 P는 이곳에 일하기로 마음먹고, 형식상의 면접을 치른 뒤 5월부터 정직원이 되었다. 나는 그녀의 취직을 진심으로 축하했지만, 문제는 그녀가 정직원이 된 이후부터 생겼다.
결
실습생들과 연구원들이 하는 일은 완전히 나뉘어 있었다. 연구원들은 주로 실험을, 실습생들은 잡일에 해당하는 일들을 했었는데, 실습생이었던 P가 실습기간중에 정직원이 되자, 인수인계 때문에 하루 종일 연구원 옆에 붙어 교육을 받는 바람에 실습생 3명이서 하던 일들을 2명이서 감당하게 되면서 업무량이 급격히 많아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전 실습에 비하면 훨씬 가벼운 노동 강도라고 말했었지만, 인원수가 한 명 빠진 데다, 업무량도 점점 많아지면서 우리는 굉장히 지쳐가고 있었다.
노동 강도도 그랬지만 항상 밝고 쾌활해서 우리 분위기를 환기시키던 P의 공백 자체도 우리에겐 하나의 상실과도 같았다. 우리는 버팀목 하나를 잃은 채, 너무 고되어 그저 퇴근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근무를 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P가 정직원이 되자, 연구원분들은 P를 '쌤'이라 부르며 존대하기 시작해서 나는 동생인 그녀에게 말조차 놓기 어렵게 되었다. 정직원이 됐다고 9살 연상인 연구원 분도 그녀에게 'P쌤'이라고 존대하는 마당에 내가 거기서 어떻게 말을 놓을 수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갑자기 정직원이 되어 말 섞을 시간도 없이 바빠진 그녀가 실습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와 함께했던 그때와 달리 조금 멀게 느껴지게 된 건, 내 속이 좁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리라.
물론 나는 P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실습생 때처럼 여전히 성실하고 사근사근했으며 정직원이 되어 입장이 달라졌다고 우리를 하대하거나 낮게 보는 일 없이 연구원들 중에선 우리에게 가장 잘 대해주었다. 나는 P를 우리에게서 가져간 연구원들을 미워했으면 했지, P를 미워한 일은 결코 없었다. 다만 나는 내가 P를 위해 해 준 것들에 대해서 조금 아쉽게 생각했다. 그녀가 적응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녀가 잘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성의를 보여왔지만, 마치 이 전의 인간관계처럼 내 노력과는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멀어져야 하는 씁쓸한 경험을 또 하면서, 무의미하게 된 내 노력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보답받기 위해 한 것은 아니었지만.
보답받지 못할 것도 알고 있었지만.
늘 이런 결과가 나오면 입가에 느껴지는 왠지 모를 쓴맛은 지울 수가 없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