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유산 후 몸을 추스르는 동안 튼튼이의 염색체 검사 결과가 나왔다. 초기 유산은 대부분 염색체 이상때문이라고 주워 들어서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희한하게도 염색체는 다 정상이었다. 선생님께서는 “그래도 정상인 게 좋은 거예요~”라며 나를 위로하셨지만 납득하기 어려웠다. 염색체 이상이 아니면, 왜 심장이 멈춘 거지? 결과를 보고 나면 속이 후련해질 줄 알았는데 한층 더 답답해졌다.
염색체 검사 후 유산된 아기의 성별을 알려주는 건 병원 마음인데 우리 병원은 알려주었다. 검사지의 마지막에 튼튼이의 성별이 쓰여 있었다. XX. 여자아이. 쌍둥이가 둘 다 여아인지 한 명만 여아인지까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나는 평소 자식을 낳는다면 딸이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해 와서 그 결과를 보니 더 울적해졌다. 그토록 바라던 딸인 튼튼이가 왔는데, 염색체도 다 정상인데, 나는 왜 보내야 했던 걸까.
선생님께서는 습관성 유산 검사를 해볼 수 있다고 하셨다. 습관성 유산, 임신 20주 전에 3회 이상의 유산이 발생했을때를 말한다고한다. 나는 아직 유산을 세 번 겪은 건 아니지만 이런 과정을 또 겪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검사를 미리 해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분만병원인 여기보다는 습관성 유산으로 유명한 곳으로 가고싶어서 선생님께는 생각해보겠다고 대충 말하고 나왔다. 알아본 병원은 여기보다는 집에서 멀지만 곧 난임 휴직을 쓸거라 시간이 많아질 예정이었기 때문에 통원에 큰 부담은 없을 것 같았다.
서초에 위치한 습관성 유산검사로 유명한 병원에 예약전화를 걸었다. 병원 자체도 인기가 많은데 여기서 가장 유명한 원장님은 전국에서 찾아오는 환자들로 몇 달간 예약이 꽉 차 있었다. 낭패였다. ‘그래도 기왕 하는 거 가장 유명한 분에게 가야지!’하는 생각에 두달이건 세달이건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러다 며칠 뒤 취소 자리가 나왔다는 연락을 받아 다행히 생각보다는 빨리 초진을 받을 수 있었다.
새 병원은 습관성 유산검사와 시험관 시술 위주로 하는 난임병원이지만 처음 다녔던 난임병원보다는 규모가 많이 작았다. 기존 병원이 여러모로 시스템화되어 있어서 때론 공장 같은 느낌이 났다면 이곳은 좀 더 의료진과 환자의 거리가 가깝다고 느꼈다. 단점은 그만큼 행정적인 부분이 덜 체계적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반복 유산 검사의 대가라는 원장님을 만나 뵈었다! 그런데 원장님께 진료받은 사람들의 블로그 글을 너무 많이 읽어서일까,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시는 기본적인 난임 관련 이야기들이 너무나 익숙했다. 우선 초진날은 나에 대해 원장님도 알 수 있는 게 없다 보니 각종 검사들만 받고 빠르게 귀가했다. 피를 8 통이었나, 정말 많이도 뽑았었다. 이 정도로 피를 뽑아도 사는데 지장 없나? 싶었는데 다행히 생각보다 멀쩡했다. 하긴, 병원이 다 알아서 죽지 않을 정도로 하겠지.
나팔관 조영술의 경우 이전에 한 기록이 있어 안할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시간이 좀 지났으니 다시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그 악명 높은 검사를 또 하게 되었다. 한 번 해본 검사니까 덜 무섭지 않을까?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진통제를 미리 먹고 검사대에 누워서 달달달 떨었다. 검사가 시작되자 또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지만 다행히 딱 욕 나오기 직전에 끝났다. 예전에 조영술을 했을 때는 나팔관 한쪽이 막혀있다고 들었는데 여기 원장님은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다행인 부분이었다.
이전에 다니던 병원에서는 남편이 워낙 바쁜 자영업자라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고, 우리는 자연 임신이 잘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굳이 남편까지는 검사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반복 유산의 원인을 찾기 위해선 부부 염색체 검사와 정자검사까지 해볼 필요가 있었기에 남편도 시간을 쪼개서 여러 검사를 받았다.
이제는 결과만 기다리면 될 것이었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학교에 있는 내 짐들을 조금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일 년간 난임휴직을 쓰기로 했기 때문에 교실을 깨끗하게 비워줘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 개인 짐이 많지 않은 줄 알았는데 십 년간 이 교실, 저 교실 이고 지고 다니던 짐이 생각보다 꽤 되었다. 대부분은 ‘언젠가 쓰지 않을까? ’하는 것들로 사실 없어도 수업에 별 지장이 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미련을 버리고 대부분 정리하거나 학교 자료실에 기부를 했다. ‘난임 휴직 하는 동안 임신해서 산전휴직, 육아휴직까지 이어 쓰고 한참 뒤에 복직할 거야. 이 짐들을 쓸 일이 없도록!’ 하는 의지(?)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렇게 버리고 기부해도 집에 가져가야 하는 짐들이 몇가지 남았다. 그것들을 차에 실으며 마지막으로 학교 운동장쪽을 바라보니 뭔가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 난임휴직을 쓰기 전에 임신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휴직을 쓰게 되었구나-하는 생각에 쓸쓸해졌다. 그래도 지난 십 년간 열심히 일해왔으니 이 김에 좀 쉬어갈 수 있겠다란 작은 기대감도 피어났다.
그리고 몇 주 뒤, 드디어 습관성 유산 검사의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병원을 찾았다.
내 검사 결과 차트를 이리저리 훑어보시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아, 이거 때문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