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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코코 11시간전

#13 다시 일어설 용기


  시험관을 시작할 무렵 오픈 채팅을 통해 시험관을 하는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피차 힘든 길을 걷다 보니 짧은 시간 안에 제법 빨리 친해졌다. 하루 종일 시험관 얘기로 수다를 떨었고, 실제로 만나서 맛있는 걸 먹으러 가기도 했다.


  우리는 누구는 남편 문제로, 누구는 다낭성이라서, 누구는 난저라서 등등 각기 다른 이유로 난임 병원을 찾고 있었다. 그중 착상 자체가 잘 안 되던 친구들은 “아 제발 임테기 두 줄만이라도 한 번 보고 싶다.”는 말을 가끔 하곤 했다. 그만큼 간절해서였겠지만, 두 줄을 여러 번 보고 다 유산한 내겐 힘이 쭉 빠지는 말이었다.


 ‘참 이런 데서도 사람들은 서로 갖지 못한 것에 부러움을 느끼는구나’     


  난 그 친구들이 부러웠다. 줬다가 빼앗는 게 얼마나 비참한 건데. 잦은 수술로 몸을 망가뜨리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데. 이런 걸 겪을 바에야 착상이 한 번도 안되었던 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친구들의 심적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거다. 얼마나 답답했겠어. 난 다른 사람의 생채기까지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던 거다.      




  세 번째 소파 술 예약을 잡았다. 수술하면서 태아 염색체 검사도 같이 하기로 했다. 아기가 떠났다는 걸 알게 되면 하루라도 빨리 수술받고 다 잊어버리고 싶지만 그게 어려울 때도 있다. 병원에 일정이 많을 땐 며칠 기다렸다가 수술을 받게 되기도 하는데, 떠난 아이를 안고 며칠 지내는 심정은? 그냥 정신적 고문이 따로 없다.


  분명 이번에는 달랐는데. 유산의 원인을 알아내서 약도 먹고, 주사도 잘 맞았는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너무 답답했다. 원장님께서 여름이의 경우 심장 기형이거나, 염색체 이상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다. 심장 기형은 정확히는 임신 중기에나 알 수 있는 문제라 100프로 확신은 못 해도, 수없이 많은 초기임신 초음파를 봐 온 당신의 경험상 심장 모양이 다른 초음파들과는 좀 달랐다고. 근데 그건 말씀대로 확실한 게 아니니 난 차라리 염색체가 비정상으로 나와주길 바랐다. 아 여름이가 아픈 아기라 그랬구나, 납득이라도 되니까.      


  수술일. 마취 기운이 사라지자 아득한 통증이 밀려왔다. 수술 후 뒤 처리를 해 주시는 선생님께 너무 아프다고 흐느끼면서 애참함을 느꼈다. 아 그래. 지난번에도 이렇게 아팠었지. 애써 꼭꼭 닫아 놓았던 지난 기억의 페이지들이 다시 열렸다. 맘이 아프면 몸이라도 덜 아프지 왜 서럽게 몸까지 아플까. 그리고 매번 이럴 거면 차라리 임신이 안 되는 게 낫지 않나? 몸과 마음이 너덜거리는 종이짝처럼 되어서 수술실을 간신히 기어 나왔다.

 


  이후 친정에 2주 정도 머물렀다. 친정 생활을 하는 게 여러모로 불편했을 텐데 불평불만 없이 함께해 준 남편에게 고마웠다. 친정에서 엄마밥을 먹으며, 가족들과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몸과 마음을 조금씩 회복시켜 나갔다. 나는 그렇게 정 많은 딸은 아니지만 결혼을 하고 독립하면서 오히려 가족의 소중함을 더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기본적인 희노애락을 공유할 수 있는 가족이 있는 게 당연하지 않다는 걸, 나이가 들면서 여러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기도 했고.


’ 임신이라는 눈앞의 목표에만 몰두해서 소중한 걸 잊고 살지 말자,‘


  친정에서의 나날은 그런 다짐을 다시 한번 꼭꼭 새겨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푹 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덧 2021년도 끝나가고 있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니 내게 남은 올해의 기록은 ‘유산, 이식 실패, 유산’이 다였다.


‘아니 임신만을 위해 일 년을 휴직했는데 이러면 올해는 내게 뭐가 남은 거지?’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걸 아주 싫어하는 나는 도저히 이 상실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올해 좀 쉬면서 취미생활을 즐기다가 임신하고… 산전휴직 쭉 이어서 쓰다가 출산하려고 했는데… 하나도 이루어진 게 없네? 세상일이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라지만 나 진짜 노력했는데?     



  밀려오는 허무함에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널부러져있던 어느 날, 무심코 sns를 둘러보다 동기 언니의 프로필이 아기사진으로 바뀐 것을 발견했다. 언니도 나처럼 임신이 어려워서 쭉 난임 병원을 다니던 사람이었다. 우린 가끔 서로의 근황을 공유했지만 혹시나 상대방이 슬픈 상황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배려하느라 자주 연락하진 못했었다.


  그런데 그런 언니의 프로필이 아기얼굴로 바뀐걸 보니 내가 다 너무 기쁘고 반가워서 언니에게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복코코야!”


  언니가 내 문자를 보고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언니는 전원 없이 다니던 병원에서 계속 도전하며 끝내 귀여운 딸아이를 만났다고 했다. 언니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며 그동안 어떤 처방을 받았는지 비결 좀 알려달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자 언니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채취 19번, 이식 9번 해서 얘 만난 거다?”


  언니의 그 말에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맘카페에서 수많은 성공 후기를 읽었지만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횟수였다. 아 언니가 병원 오래 다닌 건 대충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노력했구나… 나는 유산을 여러 번 겪은, 다른 종류의 아픔이 있긴 하지만 노력이라는 걸로 따지면 내가 언니만큼 노력했다고 볼 수 있을까? 그간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하고 딱한 사람 마냥 툴툴거렸던 게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내가 진짜 할 만큼 했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좀 더 노력해 보기로 했다.


“내년에 복직하시나요?”


  학기가 끝나가니 학교에서 복직여부를 물어왔다. 집에 있으니 자꾸 헛생각만 하고 땅만 파는 것 같아 일을 할까 생각했지만 결국 1년 더 휴직하기로 했다. 나이가 들면서 변하는 점 중 하나는 똥고집 마이웨이였던 내가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하게 된다는 거다. 나는 두 가지를 받아들였다.


1. 나는 일을 통해 활력을 얻는 사람이지만, 시험관과 일을 동시에 할 만큼 내 체력은 충분하지 않다.


2. 세상에는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으니 너무 내가 들인 노력과 매몰비용에서 의미를 찾지 말자.          



  새로운 결심과 함께 새해를 맞이했고 병원에서 염색체 검사 결과를 들으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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