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갈구한 것은 사실 '선'이었나봐
정신 차려보니 1월이 훌쩍 지났네요 이런이런...
지난주부터 여러분들에게 따뜻한 연말인사를 남기겠다고 임시저장글을 적어뒀었는데 역시 글을 위한 글을 쓰는 건 제 스타일이 아닌가 봐요. 1월이 되어서야 제 글이 향할 방향을 정했습니다.
초고를 다듬어 다시 한번 단장한 인사를 건네봅니다.
다들 따뜻한 연말연초 보내셨고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골방에 틀어 박혀 있는 관계로 다른 해보다 점잖은 연말을 보냈습니다. 크리스마스엔 이부자리를 걷고 일어나서 부모님과 케이크도 먹고 공부도 하고 절친과 동네도 걷고 연말연시치곤 너무 일상적이었죠.
모두가 특별하다고 하는 날이니 저도 덩달아 특별하게 여기고 싶다만은 .. 글쎄요. 화려한 장식과 음악, 그리고 풍성한 식사가 당장의 저를 풍요롭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일상적으로 물질적 풍요를 충분히 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지금의 저를 충만하게 하는 게 외연적인 화려함은 아니란 거죠. 그런 의미로 들뜬 거리의 분위기를 등지고 앉아 차분히 제 하루를 보내는 즐거움도 썩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럼에도 오늘을 비일상으로 기억해 줄 만한 이벤트가 하나 있어요. 바로 온라인 독서모임입니다. 이따 저녁 9시에 정아 언니가 줌 독서모임을 열어주면 30분 동안 집중해서 읽고 싶었던 책을 읽을 거예요. 책을 읽는 게 왜 비일상이냐 물으신다면 당근 제가 책을 잘 안 읽으니까요. ㅋ.ㅋ
여러분은 독서를 즐기시나요? 저는 사실 독서를 기피하는 편이에요. 활자를 두려워하거든요. 난독은 아니고 활자 공포라고 해야 할까요. 인쇄물에 찍힌 글자를 보면 숨이 막히기도 하고 눈앞이 뿌예지는 느낌을 받아요. 종이책의 두께감과 책장을 넘기는 손맛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글자가 두려운 저 같은 사람은 책 두께의 묵직한 물성이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해요.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다고요. 이해하기 어렵지만 종이 두께, 글자 몇 자에 겁에 질리는 사람이 있어요.
어쩌다 보니 이런 사소한 일상의 부분들에 쉬이 겁을 내고 공포를 느끼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말았습니다. 굉장히 골치 아프죠. 작은 요소 하나만 바뀌어도 강박적인 스트레스를 받거든요. 순간에 감정을 일희일비하는 일도 다반사예요. 그 순간이 지난다는 사실은 분명한데 그 잠깐을 혼자만으로 버틸 수가 없을 만큼 겁에 질리고 말아요. 방금 읽은 문장 한 줄이 단 5초 만에 기억이 나질 않아 눈물이 고이고 학기 내내 매일 네 시간씩 남아 복습을 하던 재정학 과목에서 D0를 받고 허탈함을 느끼는 감정을 대개는 모를 겁니다.
모두에게 일상인 일이 나의 비일상이라면 그것은 결핍이 되고 말아요. 문제는 제가 언어를 욕망한다는 거예요. 방금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력을 가진 저도 언어에 대한 욕망을 가져요. 문장을 다듬고, 질 좋은 어휘를 외우고, 문맥에 맞게 문장을 배치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하고요. 글의 구조를 보며 정형성을 익히는 것도 좋아해서 복사용지 몇 바닥의 길지 않은 글들은 빠르게 채워 넣죠. 그럼에도 일부 일상업무에 대해 해결하는 데 한계를 느껴 저의 결핍이 드러나지 않는 활동들로 저를 채워갔습니다. 정말 다행인 것은 저는 수치심에 굴하지 않는 인간이라 작은 결과라도 배우는 것이 있다면 들이받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무수한 시도를 거치면서 제가 좌절할 때면 제 친구들은 항상 제 일상을 지탱해 줬죠. 저의 일반적이지 않은 결핍을 스스로 채울 수 있을 만큼 몇 년이고 제 곁에 머물러주는 거예요.
종종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진 안 그러다가 대학 와서 이 모양일까. 이게 극복이 가능한 문제일까. 언제나 곁에 머물러주는 친구들에게도 물어요. 왜 내 곁에 있어주냐고요. 이 훌륭한 친구들은 이유가 없답니다. 그냥 자기 사람이니 곁에 있는 것뿐이라고 하네요. 모든 것에 이유를 구하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는 저 같은 사람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답변이죠.
저는 편지를 잘 쓰고 마음을 드러내는 재능이 있음에도 단어 하나 고르는 게 부끄러워 그저 그런 인사말이나 써주고 마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냥 그 친구를 떠올리면 부끄러워져요. 너무 귀해서 아무 단어나 갖다 붙이기 싫을 정도로 고결함이 있거든요. 세상에 절대선은 없고 모두의 정의(justice)는 다르죠. 그럼에도 자기본위적 사고를 하는 제게 그런 절대적 순수성이 가지는 낭만과 환상은 그저 동경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 선해서 절대성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하거든요. 따지고 보면 전 성취의 결핍이 아니라 고결함의 결핍을 채워온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스스로의 선택으로 선을 행한다는 저만의 자부심 역시도 저만의 것이 아님을 매 순간 실감하면서요.
여러분은 악(惡)을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저는 24년에 악에 대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저라면 악을 ‘하나‘라는 단어로 치환해 볼 것 같아요. 하나라는 단어가 내포한 폭력성을 사람들은 쉬이 간과해요. 획일성, 단일성, 절대성, 순수성.. 사람에게 가장 쉬운 선택을 줌과 동시에 모든 가능성을 잘라버리고 말거든요. 앞서 나열한 모든 일률적인 단어를 절대선으로 여기던 개인이었기에 이 가치관에서 벗어나려 어찌나 애썼는지 몰라요. 새로운 사상을 들이지 않은 채 환기되지 않는 아집, 융합과 확장이 기본인 창의성은 더더욱 기대할 수가 없겠죠. 좋은 의사결정자가 되길 그만둔 것도 같은 흐름이에요. 저의 계산에 너무 많은 요인들이 추가된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성의 추구가 저에겐 곧 선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멀어지려고 하던 절대성인데 기준을 알 수 없는 ‘옳은 ‘ 일을 하는 선량한 사람들을 보면 다시 선악에 대해 고민이 들어요. 정말 세상에 진리가 존재하는 것일까? 당연함이 당연한 것이라는 상식 속에 섞여 선을 묻어가는 회색분자는 다시 또 갈등합니다.
25년 첫 영화는 하얼빈이었습니다. 아버지와 단둘이 늘 가는 극장을 갔고, 늘 고르는 캐러멜팝콘과 제로콜라를 품고 영화를 봤어요. 환갑 아저씨와 27살 백수 딸내미 모두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물을 쏟았답니다. 귀 빼고요.
하얼빈은 영웅서사라기보단 군상극이었어요. 최근 제가 하고 있던 선악에 대한 고민과 맞닿은 인간 본성을 고찰하게끔 하는 영화였죠. 뭐랄까 설원을 달리는 열차 안에서 HB 연필로 사각사각 적은 여행객의 고뇌가 담긴 편지 같달까요. 비록 그 편지지는 빨간 잉크로 인쇄된 프레임이 둘러진 값싼 펄프로 만들었을지언정 그 안에 담은 내용만큼은 값을 매길 수 없을 것만 같은 영화였습니다. 절제된 색채 사용, 낯선 앵글, 여러 인물의 감정을 세심히 드러내는 연출이 마음에 들었어요.
단 한 장면을 꼽자면 일본군 중좌와 밀정이 된 독립군의 식사씬을 꼽을 것인데요. 독립군 중 가장 지식인인 인물이 자신을 고문한 군인과 독대하며 두려움과 허기에 바르르 떨어요. 잠시간의 일방적인 명령을 듣다 중좌가 검지 한 마디만큼 던져주는 고깃 조각을 맨손으로 빠르게 입에 넣어요. 품위가 무슨 소용인가 싶은 장면이죠. 인간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도 모든 게 무너진 처지라면 되레 그 장면은 극도로 우아하게 인간의 본성을 그렸다는 생각도 들어요.
다행인 건 이 영화는 인간을 단편적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거예요. 안중근이 이 자를 믿어주었을 때 이 자는 본성을 회복하고 자신의 선을 실행하고 말거든요. 저는 사람이 어리석고 이기적이라고 믿고 싶은데요. 사실 끝까지 선할 것이라는 기대를 접지 못해요. 인간이 날 만족시킬 것이란 기대는 접은 지 오래나 그럼에도 단 한 명이라도 성장하고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면 믿어주고 싶은 마음이죠. 그럼에도 세상에 성악설을 신봉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선한 본성을 알아채기 힘들 만큼 개인을 그을음에 묻어버리고 만다는 방증이 아닐지.
사실 이런 믿음은 저 자신을 믿고 싶은 마음인 것 같아요. 전형적인 유약한 인간이기에 고결한 친구들이 곁에 없었더라면 얼마든지 비열해지고 비겁해졌을지도 몰라요. 제 주변의 완벽히 통제된 환경을 벗어나는 순간 제 예상은 현실이 되죠. 세상은 악이 고이는 구조이고, 그것이 계속 양산된다는 것을요. 저 역시도 악을 배양하는 페트리접시 신세였을지 누가 알겠어요. 저는 세상의 악을 답습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악을 향해 악을 쓰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여전히 확신할 순 없지만, 누구든 선을 바라듯 20대의 결핍은 이제 경계할 만큼 경계했고 저의 소명으로써 자리한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젠 새로운 결핍인 지식 추구에 골몰하고자 합니다. 이걸 극복해야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인생 사나워지기 전에 정신 차린 걸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악으로 규정하는 고립이 저를 썩게 만들까 두렵습니다. 동시에 사람들이 주는 다정한 안락함이 너무 달콤해서 언제라도 손을 뻗고 싶어질까봐 또 두렵습니다. 고독한 새해를 맞이하고 싶은데 어제도 오늘도 눈을 감고 뜨는 모든 순간에 2025년 필자의 행복을 빌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사람들로 행복해지고 마는 내가 싫은데 애정 어린 카톡 메시지 하나에 행복을 느껴요. 거기에 내재된 광대기질도 이런 다디단 사람들과의 관계를 포기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환기하는 사람으로서 사회에 기여하고 싶으니 감내해 보겠습니다. 종종 올리는 일기로 개그 욕심을 채워볼게요.
더불어 새해 인사도 남겨봅니다.
이제야 새해 인사를 건네기 무르익은 타이밍이네요.
보통 덕담은 건네는 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타인에게 건네곤 하잖아요? 저는 여러분이 새해에는 2024년보다 타인과 자신의 더 많은 결핍들을 포용할 수 있는 너그러움을 지니시길 바라요. 몸과 마음도 건강하고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곁에 누가 있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누굴 언제 만나서 어떤 생각을 들게 하는지가 삶의 물길을 내잖아요. 설사 탁류에 섞이더라도 이미 굵은 강줄기를 탁한 지류 하나로 오염시킬 순 없으니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흐르는 강이 되시길 바랍니다. 단 한 가지, 강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경우만 아니라면 그 어떤 삶도 아름답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언제나 흐르는 삶을 사시길 바라요.
제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축복이에요.
2025년의 필자에게도
스스로 악을 정화하고 선을 따라 흐르는 강이 되길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