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를 시작하는 법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공기의 흐름은 일상이었다. 처음 대만 여행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미 익숙해져버린 일상에 낯선 것을 새로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피부는 한국의 온도와 습도를 기억하고 있었고, 스쳐가는 모든 것들의 초점이 고정쇠를 단단히 박아 넣은 것과 같았다. 단조로운 일상의 변주는 가끔 마시는 술과, 가끔 친구들과 함께 가는 클럽에서 춤을 추는 것 정도면 되는 그런 류의 인간이었다. 익숙해져버린 일상은 천천히 굳어가는 시멘트처럼 일종의 균형이 되었다.
나의 첫 대만여행은 3월이었다. 한국은 아직 추위가 다 가시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아직 온기를 기억하는 몸의 피부가 파르르 떨리곤 했다. 나는 일산에서 살던 방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내려와 있었다. 확실히 부산은 일산보다 따뜻했고, 여전히 지루했다.
대만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언제나 대만으로 가고 싶었고, 첫 여행을 항상 대만으로 가고 싶었고, 첫 홀로 하는 여행도 대만으로 가고 싶었다. 나는 일을 하다 내려왔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퇴직금이 들어올 터였다. 나는 그것을 잠시 놔두기로 하고, 그동안 모아놨던 돈으로 비행기표부터 끊었다. 당시는 2016년이었고, 부산 김해공항과 타이베이 타오위안 공항까지는 23만원 정도 되는 가격으로 갈 수 있었다. 심지어 FSC인 중화항공을 타고 갈 수 있었다.
나는 첫 해외 여행이었고, 처음으로 혼자 가는 해외여행이었다. 갖가지 미디어로 대만에 대한 것들을 학습하긴 했지만, 직접 눈으로 마주하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습한 공기가 폐부 깊숙하게 들어왔고 끈적한 더위가 지속되었다. 모든 게 처음이었던 나에게 호텔은 사치인 것 같아 게스트하우스를 애용했다. 신베이터우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였다. 이후, 나는 이 게스트하우스를 꽤 여러 번 방문했다. 롱스테이 타이페이(LongStay Taipei)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였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난 그곳에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지금도 연락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한국어로 이야기했던 추억, 홍콩 사람과 번역기를 돌려가며 밤새 이야기를 했던 기억, 대만에서 장기투숙을 하는 영국인 아주머니 등... 지금에 와서 게스트하우스는 조금 불편한 기색이 없잖아 있지만, 스무살 초반의 나는 그런 불편함마저 신선했다.
물론 인스타의 영향도 나에게는 크게 다가왔다.
태그를 통해서 알게된 대만 친구들은 나를 환영했고, 반가워했고, 여행의 평안을 기원해주었다. 그저 소셜 미디어로 알게된 한국사람1에 불과했던 내가, 그들의 영역 속으로 들어감으로서 일종의 소속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지금은 폐업한 Perfume Dance, 같은 로컬 브랜드를 알려준 친구들에게는 지금도 고맙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곳에 방문했던 추억의 편린은 여전히 내 기억속의 액자가 되어 있다.
모든 과정에는 프롤로그가 존재한다. 나의 프롤로그는 언제일까, 하고 귀국길에 생각해 본 적 있었다. 여러 번 대만을 다녀왔고, 이제 타이베이 정도는 눈 감고도 지도가 그려지는 그런 상황이지만 나는 여전히 프롤로그를 경험하고 있다. 새로운 경험이라는 것은 언제 다시 나타날 지 모르는 선물 같은 현상이다.
길고 긴 코로나 시국이 끝난 이후, 오랜만에 방문한 대만은 낯설었다. 내가 다녀갔던 매장들이 사라지고 내가 알던 가격들은 조금씩 올랐다. 시먼을 방문할 때마다 항상 먼저 방문했던 우육면집이 사라지고, 친구들은 결혼을 하고, 대만을 떠나 상하이에서 일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의 새로운 프롤로그를 항상 응원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프롤로그에도, 평안을 기원한다. 단순한 여행기가 아닌, 타이완이라는 나라를 홀로 걸음으로서 느꼈던 감정들을, 여전히 나는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