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매불망 손꼽아 기다렸던 나의 버킷리스트! 피렌체를 보러 가는 날이 되었다. 피렌체라는 도시를 가 보고 싶었던 이유는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읽고 나서였다. 이 소설은 남녀 간의 연예에 관한 이야기인데, 흥미로웠던 점은 남자 소설가인 쓰지 히토나리는 소설 속 주인공, 아가타 준세이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서술했고, 여자 소설가인 에쿠니 가오리는 같은 이야기를 소설 속 여주인공, 아오이의 입장에서 서술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같은 내용의 소설책이 에쿠니가 쓴 것은 빨간 표지, 쓰지 히토나리가 쓴 부분은 파란 표지로 묶어 단행본 세트, 두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소설의 배경이 된 곳이 이탈리아의 피렌체였는데 헤어진 두 남녀가 서로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지만, 예전의 아픈 상처로 주위만 맴돌고 있다가 준세이가 서른 살 생일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나자고 아오이와 한 약속을 기억하고 그것에 기대를 걸어보며 두오모에 오르는 장면이 있다. 가끔 그런 소설들이 있다. 너무나 생생하게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을 해버리고 소설 속에 묘사된 장면을 자세하게 상상을 해버려서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소설. 이 소설이 나에게 그런 소설이었다. 그래서 신비하게도 피렌체에 가고 싶은 욕망이 한 번도 못 가본 여행지를 가보고 싶은 정복의 욕구나 설렘의 감정이 아니라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바래져서 그 기억을 생생하게 재생해 보고 싶은 욕망처럼 느껴졌다. 피렌체 두오모에 올라 내가 좋아하는 바흐에 ‘Air’를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폰을 한쪽씩 귀에 꽂고 피렌체 전경을 바라다보면서 들어보고 싶었다.
윌도 나와는 다른 이유로 피렌체에 가 보고 싶어 했는데 캐나다의 친구들이 그에게 ‘유럽 여행하는 동안 가장 좋았던 도시가 피렌체였다’, 혹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피렌체였다’ 하며 그에게 환상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피렌체라는 도시를 몹시 궁금해했다. 그래서인지 윌도 피렌체로 가는 날 살짝 상기된 표정이었다.
포지본시에서 피렌체까지는 버스로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우리는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버스에 올랐다. 포지본시 버스 정류장은 기차역 바로 앞에 있는데 피렌체에서 산지오마니로 가는 관광객들은 포지본시에서 교통편을 갈아타야 하므로 이 조용한 도시에 항상 버스정류장이나 기차역만 붐빈다.
드디어 버스에서 내려 피렌체에 발을 디디는 순간 엄청 기분이 좋아야 했지만 사실 그냥 그저 그랬다. 모든 거리가 그동안 봐왔던 거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고 로마랑도 규모만 작지 비슷해 보였다. 내가 그동안 아름다운 도시들을 너무 많이 보고 와서 감흥이 많이 떨어졌다. 유럽의 아무 도시도 가지 않은 채 피렌체에 먼저 왔으면 아마 무척 감동하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가장 먼저 부르넬레스키의 돔이 보이는 루프탑 커피숍을 찾아갔다.
카페는 호텔이 객실 손님을 위해 마련한 호텔 내부의 루프탑 카페였고 다행히 외부 손님을 받아 주었다. 루프탑으로 들어서자, 성당의 눈부신 자태가 눈에 확 들어왔다. 아름다운 돔을 비롯해 피렌체 도시 전체도 함께 조망할 수 있었다. 타이밍이 좋았던 것인지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인지, 우리가 도착했을 때 카페는 사람들로 많이 붐비지 않았다. 윌은 카푸치노를 난 에스프레소를 한 잔 시켜놓고 아름다운 성당과 피렌체 도시를 감상했다. 거대한 반구 형태의 돔은 톤 다운된 오렌지 섞인 갈색빛으로 쨍 한 햇살 아래 위풍당당하게 우뚝 서 있었고 돔과 함께 조토의 종탑도 보였다. 돔에 올라가면 정작 돔의 모습을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당 외관을 천천히 여유롭게 탐닉할 수 있다. 그래서 사실 이 성당은 오히려 루프탑 카페에서 바라볼 때 더 아름다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대성당의 이름은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로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이다. 피렌체의 중세 마을 이름은 꽃의 마을이었고 성당은 이 마을 이름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영어로 피렌체를 플로렌스(Florence)라고 한다. 이탈리아의 성당은 지붕이 반구형, 즉 영어로 돔(Dome)으로 되어있는데 이 돔은 집을 뜻하는 라틴어 도무스(Domus)에서 왔다. 대성당 지붕이 다 돔 형식으로 되어 있어 이탈리아어로는 성당 자체를 두오모라고 부른다고 한다. 피렌체의 두오모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성당이고 1296년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로 착공되기 시작해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명의 건축가들의 손을 거쳤다. 특히 돔 건축은 엄청난 하중을 견뎌야 하는 작업으로 뛰어난 기술이 요구되면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설계를 응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응모에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의 설계가 당선된다. 그는 금세공인이자 조각가였는데 로렌초 기베르티와 경쟁하는 사이었는데 1401년 피렌체 세례당 출입문의 양각 콩쿠르에 응모하였지만 로렌초 기베르티에게 밀려 하지 못하고 로마로 건너갔다. 로마에서 설욕의 기회를 엿보며 로마 건축을 연구하던 중 그는 피렌체 돔 설계 소식을 듣고 응모하였고 마침내 당선된다. 그는 로마에서 본 판테온의 돔에서 영감을 얻어 피렌체 대성당의 설계에 적용하였다. 지붕이 하중을 견뎌야 하므로 이중 벽 구조로 만들어 안쪽에 무거운 돔이 바깥쪽 돔을 받치도록 했다. 그것을 지을 당시 사람들이 안될 거라고 비판했지만 1436년에 제작된 돔은 현재까지도 내 눈앞에 이렇게 건재하게 남아있다.
이제 돔 안쪽을 둘러보려고 거리로 내려가 입장료 사는 곳을 찾아 헤맸다. 물어물어 입장료를 판매하는 매표소를 찾았는데 글쎄 표가 매진이라는 것이다. 헛웃음이 나왔다. 인생 버킷리스트라며 여기까지 왔는데 두오모에 못 올라가다니! 처음에 표가 없다는 말에 너무 충격이 심해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매표소를 한동안 떠나지 못했다. 잠시 후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미리 잘 알아보지 않고 온 나에 대해 짜증과 화가 밀려왔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나중에 다시 오는 수밖에……. 그리고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나는 피렌체에 와있다!
루프탑 커피숍에서 완전한 돔의 모습을 감상한 것에 만족하자. 두오모에 오르는 것은 다음으로 기약하면 나는 다시 피렌체에 올 수 있다.
그런데 다시 피렌체에 오게 되었지만, 그때도 두오모에 오르지 않았다.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소설을 읽었을 때 분명 ‘두오모에 올라 바흐의 에어(Air)라는 곡을 들으며 도시를 감상해 봐야지!’라고 다짐했었는데 이상하게 두오모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우리는 자유롭게 마음 가는 대로 도시를 돌아다녔다. 맛집에 가서 스테이크를 먹고 길거리에 퍼질러 앉아 젤라토를 먹고 이탈리아 로컬 맥주를 마시고 친구들에게 선물로 줄 가죽 팔찌도 샀다.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도시를 충분히 느끼고 나니 사람들이 왜 피렌체를 좋아하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노을이 질 때쯤 미켈란젤로 언덕에 올라갔다. 미켈란젤로 언덕에 있는 계단에는 노을을 보러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우리는 계단을 피해 사람들이 사진을 많이 찍고 있는 탁 트인 공간으로 가서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미리 가져간 끼안티 와인을 땄다. 피렌체 도시 전체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베키오 궁전과 베키오 다리도 보이고 피렌체 대성당도 보였다. 이곳에서 보는 모든 것이 감동적이었다. 아르노강 수면 위로 비치는 건물 그림자까지 예뻤다.
해가 점점 기울면서 곧이어 도시 전체가 아름다운 황금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이 멋진 풍경을 감상하며 윌과 함께 바흐의 ‘에어(Air)’를 들었다.
촉촉하고 행복한 감정이 마음속으로 물밀듯이 밀려왔고 내가 이 감동을 느끼려고 두오모에 오르지 않았던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Everything happens for a reason.
영어 속담에 ‘모든 일은 이유가 있기에 일어난다’라는 말이 있는데 살다 보면 문득문득 이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