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가이드의 경우 평일에는 행사가 없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투잡을 한다. 여행사도 이 점을 알고 가이드들을 채용한다. 하지만 원래 나의 직장이었던 회사는 달랐다. 지금에야 N잡을 하지 않으면 살아가기에 너무 빠듯하기에 투잡, 쓰리잡이 필수지만 내가 가이드를 시작했던 그 시절에는 거의 모든 회사들은 투잡을 금기시했다. 주말에 다른 일을 하게 되면 평일에 하는 업무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사실 지금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회사에 존재하는 모든 내규가 납득이 가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최대한 들키지 않게 가이드 생활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배정받은 여행지는 전라북도 무주에 있는 덕유산 무주구천동계곡이었다.
무주구천동 계곡은 덕유산 국립공원의 가장 중심에 해당되는 곳으로 과거 승려 9,000명이 계곡에서 수도를 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총 33경의 경치가 있는 이곳은 계곡 따라 덕유산을 산책할 수도 있고, 깊이가 다 다른 계곡에서 물놀이를 할 수가 있어서 여름이면 인기 있는 코스 중에 하나였다.
이런 인기 있는 여행지를 배정받으면 가이드들은 행사가 주는 긴장감이 조금은 완화된다. 기본 이상으로 여행지가 주는 즐거움이 기본 이상이기 때문에 그날 행사를 하는데도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긴장감이 조금 완화된 상태로 출발 장소인 시청역에 도착했다.
행사의 모든 정보가 담긴 인원을 점검하기 위해 명단을 확인하다가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성뿐만 아니라 이름까지 특이해서 한 번만 들어도 잊히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때 다니던 회사의 과장으로 있던 사람의 이름과 같았다. 설마, 아무리 특이한 이름이라도 이 세상에 한 명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역시 과장님이었다. 저 멀리서 내가 서 있는 버스 앞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과장님을 보자, 순간 고개를 돌렸다. 팀은 달랐지만 같은 층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면은 있는 사이였다. 절대 나를 모를 수 없다. 뒤를 돈 내 등 뒤로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고민을 백만 번 하다가 쓰고 있던 모자를 푹 눌러썼다. 얼굴을 최대한 보지 않고, 자리를 안내했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죄를 지은건 아닌데 죄를 지은 것 같았다. 들키면 안 되는 짓을 한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투잡을 한다는 사실이 회사에 알려질 경우 발생되는 수만 가지 경우들이 내 머릿속을 비집고 나왔다.
예약되어 있는 인원이 모두 도착하자, 버스는 출발했다. 그 사람의 자리는 다행인지 아닌지 맨 뒤였다. 하지만 안내를 하기 위해 버스 앞서 서면 가장 잘 보이는 곳이기도 했다. 최대한 그쪽을 보지 않고 내 소개를 했다. 당연하지만 너무 내 이름을 대놓고 말했다. 과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눈을 보자마자 들킨 걸 알았다. 사람은 눈으로도 이야기한다는 사실을 그날 알았다. 버스에서는 중간중간 손님들이 앉아있는 자리를 체크하기도 하고, 문제가 있는 고객들의 민원을 응대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다양한 고객들을 직접적으로 만나기도 한다. 뒤쪽 자리를 갈 때마다 최대한 과장님 가까이는 가지 않게 노력했다.
무주구천동계곡에 도착을 했다. 여행지에서는 어떠한 돌발상황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는 과장님도 그냥 손님 한 명으로 보였다. 내가 지금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이 오늘의 행사라는 사실을 점점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다행히 그날 과장님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나 또한 개인적으로 말을 걸지 않았다.
토요일, 행사를 마무리하고 연락을 먼저 해볼까 고민을 수만 번 했다.
일요일, 거의 뜬 눈으로 지새웠다. 평소 과장님이 회사에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 당시에는 나쁘지 않았던 행동들도 확대해석 되어 나쁘게만 생각됐다. 그렇게 나쁜 사람이니 반드시 회사에 알릴 수도 있겠다는 어이없는 결론까지 내렸다.
월요일, 초등학교 시절 음악 가창시험을 보는 날보다 더 회사에 가기 싫었다.
회사에 출근했다. 풍경은 똑같았지만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흠칫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게 아마도 이럴 때 쓰는 말 같다. 중간중간 과장님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과장님이 지나갈 때마다 전화를 하는 척 자리를 피했지만, 다른 평일과 다르게 일이 몰리는 월요일이라서 그런지 업무에 집중하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게 퇴근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과장님이 회사에 나의 투잡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날이 있다. 미래에 생길 일에 대한 두려움, 걱정 때문에 오늘 하루를 전전긍긍하는 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때, 내가 전전긍긍하느라 버린 그날들이 얼마나 아까운지..
내가 전전긍긍하느라 놓쳤을 순간들이 너무 아깝기만 하다.
아직도, 그 사람이 왜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지는 모른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서 일수도 있고, 어차피 본인일이 아니기에 그냥 넘어간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조금이나마 나를 생각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나의 상상만으로 나는 그날 행사에 집중하지 못했고, 한 사람을 나쁘게 몰아갔다.
사람이 하는 상상은 지극히 '나의' 시선이 중심이다. 그러다 보면 작은 일도 크게 느껴지고 별거 아닌 일도 확대해석 하게 되고, 나쁘지 않았던 일도 나쁘게 확대해석 된다. 그렇게 쌓인 오해들로 잃어버린 인연들, 잃어버린 시간들은 또 얼마나 아쉬운가? 나의 시선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시선, 더 나아가 그 주변의 시선까지 볼 수 있는 시야가 있다면, 이런 일은 조금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