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은 나만의 놀이터
나는 사남매 중 막내로 자랐다. 6살, 5살, 3살 터울이 있는 오빠들과 언니가 있다. 사남매 중 유독 잘 달리지 못했고 눈이 여렸던 나는 술래잡기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놀이를 하면 늘 깍두기였다. 놀다 보면 으레 혼자 남을 때가 있었다.
한창 뛰어놀기 좋아했던 오빠들과 언니에게 툭하면 울고 잘 뛰지 못하는 나는 성가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여럿이 놀다가 혼자 남게 되는 시간, 나는 마을 교회 담장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그곳에는 소복이 자라난 이끼들이 있었다. 어린 내 눈에 그것은 신비로운 작은 숲이었다.
'우산이끼'라는 이름을 알기 전부터 초록초록하고 작고 앙증맞은 이끼는 나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때때로 나는 작은 소인이 되어 이끼 사이를 걷는 상상을 했다.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레 이끼를 어루만지며, 나는 거인이 되기도 하고 요정이 되기도 했다.
국민학교에 입학한 후 이끼를 채집해 가는 숙제가 있었다. 반 아이들마다 채집해온 이끼의 모습이 달라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담장 밑, 돌계단 틈, 나무 밑동, 축축한 벽면… 이끼들은 제각기 다른 곳에서 저마다의 모습으로 자라고 있었다. 대부분의 이끼는 부드럽고 촉촉한 질감이었다. 작고 낮게 자라는 초록 식물이 주는 안정감이 좋았다.
"만약에 이끼 사이에 작은 요정들이 산다면, 그들에게 나는 얼마나 큰 거인일까?"
혼자 웃던 때도 있었다. 소인국을 탐험하는 걸리버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산이끼를 타고 날아다니는 상상도 하고, 납작한 이끼 아래 작은 집이 있는 요정들의 모습도 상상하는 게 좋았다.
집으로 가는 좁은 골목길 군데군데 자라난 이끼는 나만의 작은 요정들의 숲이었다. 형제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올 때,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이끼 숲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 순간만큼은 혼자가 외롭지 않았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가끔 이끼를 보면 발걸음을 멈춘다. 빌딩 숲 사이 작은 화단, 공원 벤치 아래, 오래된 골목 담벼락… 도시 한가운데서도 이끼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다.
그때 깨닫는다. 상상력이란 결핍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남들이 그냥 지나치는 것에서 이야기를 발견하고, 작은 것에서 우주를 보는 힘이라는 것을.
혼자 남겨졌던 그 시간들이 사실은 선물이었다. 이끼 숲은 나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견디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상상은 그 시간을 풍요롭게 채워주었다.
지금도 나는 가끔 묻는다. "저 이끼 아래에는 정말 작은 요정이 살고 있을까?"
그리고 혼자 웃는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 질문이 즐거운 것은, 상상력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는 증거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