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지점프를 하다 리뷰
"번지 점프를 하다"는 애정영화다. 그러나 다른 애정영화와는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우선 구성이 그렇고, 액자기법이 그렇다. 또한 과거로의 회상과 엇갈림과 합일의 표현 등이 매우 특이하다. 이 영화는 이상의 것들을 염두에 두고 보아야할 작품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동성애 선전영화라거나 진부한 사랑 이야기라거나 하는 식의 결론을 내리기 쉽다. 이제 작품을 감상할 때 주의할 점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이 영화에서 제일 먼저 주의해야할 것은 작품 속에서 과거와 현재의 섞임구성방식이다. 이 작품에서 과거로의 회상은 두 사람에 의해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하나는 남주인공인 인우에 의한 회상이고, 다른 하나는 태희의 환생인 현빈의 회상이다. 인우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현재에 있는 존재이다. 태희와 사랑할 때도 현빈과 사랑할 때도 인우는 현실의 인물이다. 그러므로 인우의 회상은 과거에 대한 단순한 회상이고 회귀일 뿐이다. 이러한 인우를 살려주고 빛나게 해주는 존재가 바로 현빈이며 그의 잠재의식을 통해 배출되는 태희에 대한 과거이다. 즉, 인우에게 있어서 회상은 현재의 현상을 보면서 과거의 사랑을 되씹어보는 과거로의 회상이고, 현빈에게 있어서는 과거의 태희가 현재에 현빈에게 투영되어 현실에 반영되는 살아있는 과거이다. 이것은 지나간 것이며 죽어버린 과거의 사랑이 진행 중이며 살아있는 현재의 사랑으로 나타나도록 만들어주는 장치가 된다. 이러한 장치를 통해 두 사람의 사랑은 모양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으며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랑으로 승화할 입지를 확고하게 다진다. 이 장치는 뉴질랜드의 계곡에서 줄 없는 번지점프를 하면서 미래로 옮아가게 되고 영원한 사랑으로 자리하게 된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과거에 대한 회상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인우의 과거 회상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진행된다. 현빈과의 사랑이 진행되는 순서가 바로 인우와 태희의 사랑이 진행되는 순서이고 그 순서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으며 알고 있는 시간의 순서이다. 과거에 대한 인우의 회상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로 진행되는 지극히 단순한 회귀이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인우의 사랑이 사라질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평범성에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현빈의 잠재의식을 통해 나타나는 태희의 과거이다. 그것은 인우에게서 일어나는 과거에 대한 회상 순서와 정반대로 진행되는 특징을 지닌다. 즉, 과거 중에서 현재와 가까운 순서부터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빈의 행동과 말 등을 통해서 보여 지다가 용산 역 앞에서의 사고로 이어지면서 태희가 인우를 보고 빗속으로 나가는 장면에서 마무리 된다. 과거를 현실에서 먼 것에서부터 현실과 가까운 것으로 회상하는 수법과 현실에서 가까운 것에서부터 먼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중의 회상 장치를 통해서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부여함으로써 그 사랑이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는 기반을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살펴볼 것은 엇갈림과 만남의 방식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두 사람의 사랑은 지속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필연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갈등과 대립이 수반되지 않으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루함을 느끼게 할 수밖에 없다. 긴장감과 박진감을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삶과 죽음으로 대별되는 만남과 헤어짐, 헤어짐과 만남, 그리고 영원성이라는 장치이다. 이러한 엇갈림은 사랑의 숭고함과 영원성을 한층 높여주는 훌륭한 장치임에 틀림없다. 조선조 전기에 김시습이 지은 금오신화의 「이생규장전」에서 남녀 주인공의 만남과 이별의 모티프가 바로 삶과 죽음, 그리고 환생과 사랑, 그리고 영원성으로 회귀라는 것을 보면 이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우와 태희의 만남과 사랑은 그 영원성을 담보하기 위해 태희의 죽음이라는 장치를 활용하고, 그것은 다시 환생이라는 장치를 통해 현빈으로 다시 돌아온다. 여기서 만약 인우도 죽었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영화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만남과 사랑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헤어짐과 회귀가 있어야 하는데, 헤어짐과 회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같은 자리에 언제나 있어야 하는 인우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인우는 태희가 죽었다고 해서 죽을 수 없다. 태희가 돌아올 수 있도록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비오는 날 두 사람이 싸우다가 인우가 우산을 부숴버리고 갔다고 돌아왔을 때의 장면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휘지 않는 직선처럼 꿋꿋이 서 있는 인우가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돌아와야 했던 태희가 돌아올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이러한 엇갈림과 만남의 이중 장치를 통해 두 사람은 영원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제는 두 사람이 모두 직선이 되어 함께 비상하는 미래로 향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줄 없는 번지 점프이다. 즉,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 남성과 여성이라는 엇갈림의 구조를 넘어서서 영원성을 잉태하게 된 것이다.
네 번째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하나의 공간에 늘어선 시간의 삼중구조이다. 우리의 인식으로 볼 때 공간은 현재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현재의 것이고 단순한 시간에 맡겨진 움직이지 않는 존재이다. 이러한 공간은 시간의 변화라는 마법적 효과가 없으면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날 수 없고, 새로운 것들을 담을 수 없다. 즉, 시간의 마술에 의해 공간은 늘 새롭게 태어나고 새로운 존재를 담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보이는 시간의 삼중구조가 바로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시간이 된다. 첫 번째 시간은 중심으로 잡고 있으면서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인우의 시간으로 태희와의 영원한 만남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현재의 공간과 일치한다. 두 번째 시간은 인우의 회상 시간으로 현재에서 먼 시간, 특히 태희와 만나서 사랑하는 과거의 시간을 일반적인 순서에 따라서 밟아가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태희와의 만남을 향해서 흘러가는데, 왜냐하면 태희는 이미 현실에 와 있기 때문이다. 한편 태희의 시간은 현재와 가장 가까운 시간에서 먼 시간으로 거슬러 가는데, 이것 역시 인우와 만나기 위한 시간의 거스름이다. 얼핏 보아서는 엇갈리는 듯한 시간의 삼중구조는 용산역이라는 공간으로 합쳐지고 두 사람은 영원한 사랑을 위해 뉴질랜드에서 줄 없는 번지점프로 이동한다. 이러한 삼중의 시간 구조에 의해 줄 없는 번지점프의 공간은 새로운 사랑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되고 영원성을 담보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영화는 동성애를 선전하는 작품이라느니 동성애를 비판하는 작품이라느니 하는 따위의 것은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