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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 May 03. 2023

할머니에게 세상을 누비는 손녀가 - 발리 01

길리섬에서 어설펐던 첫 바다수영과 스노클링


 할머니를 기억하면서 수영 이야기는 빼놓을 수가 없는 것 같아. 내가 초등학생 때까지는 할머니가 종종 수영장을 갈 때 같이 쫓아갔잖아. 바구니가 달린 까만색 투박한 자전거의 뒷자리에 엉덩이를 욱여넣고 할머니를 꼭 붙잡고 갔었어. 나는 초등학교가 끝나면 곧장 할머니 집으로 갔었고, 엄마가 올 때까지 할머니랑 보내던 시간이 20년이 훌쩍 지났어도 추억으로 남아있네. 나는 그때도 수영을 썩 잘하지도 않았고, 튜브 타고 놀 줄이나 알았지만 그냥 할머니랑 노는 그 시간이 좋았던 것 같아.


 할머니는 수영을 참 잘했던 것 같아. 보통은 난 어린이용 풀장에서 놀곤 했는데, 그날은 할머니를 따라 어른 풀장에 용감하게 들어가 보고 싶었어. 아차 싶었지, 내 키가 그렇게 작았는지 그리고 그 풀이 그렇게 깊었는지 몰랐어. 할머니를 졸졸 따라가고 싶었는데, 할머니는 어찌나 빠르던지 정신을 차렸을 때 내 발끝은 전혀 닿지를 않더라고. 너무 무서워서 레일을 꼭 잡고 불소 향이 물씬 나는 물을 꼴깍꼴깍 마셔가면서 간신히 풀 끝까지 쫓아갔는데, 할머니는 그제야 수영을 끝내고 날 찾았어. 풀장 밖으로 얼른 뛰쳐나가서 다시는 들어가지 않겠다 속으로 다짐했지만 할머니한테는 내가 얼마나 용감하게 어른 풀을 종단했는지를 10분 넘게 자랑했을 거야.


 사고가 나고, 할머니가 나이가 들고, 더 이상 나를 자전거에 태우지 못할 만큼 내가 커버리면서 자연스럽게 이 일들은 할머니와 나의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나는 수영을 할 때마다 코가 아리게 들이켜던 수영장 물이 많이 생각나.


 여행을 같이 간 친구가 물개 같았어. 바다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스노클링도 하고 다이빙도 하자고 들떠서 이야길 했거든. 나는 수영을 할 줄 모르니 썩 내키진 않았지만... 그래도 무엇이든 경험은 남는 거란 생각에 알겠다고 해버렸지 뭐야. 예약은 딱히 안 했는데, 숙소 근처 바닷가를 걸어 다니다 보면 작은 스노클링 가게들이 참 많더라고. 꼼꼼한 친구는 근처 가게들의 후기를 주욱 확인하고 나서야 한국인들에게 후기가 좋다는 가게를 골랐어. 숙소에서 자전거를 타고 8분 정도 달려가면 나오는 곳인데, 간판도 크게 없는 데다가 보트 한 척, 그리고 평상 하나가 있는 꼬질꼬질한 곳이었어. 해풍을 오래 맞아 새까맣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정말 바다 할아버지 같은 인상 좋은 아저씨 한 분하고, 젊은 친구가 나와서 우릴 맞이했어.


 한국 사람이 많이 다녀갔었나 봐. 바다 할아버지는 더듬더듬 간단한 한국어를 할 줄 알았고, 수영을 못 한다는 내게 연신 '괜찮아요, 다 해요. 어린이도 해요.'를 외치면서 구명조끼를 하나 던져줬어. 난생처음 오리발을 품에 안고 생명줄처럼 조끼를 꽉 매고 큰 보트에 친구 둘과 앉아 벌렁거리는 심장을 숨기려고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어. 아마 친구는 몰랐을 거야, 내가 그렇게 겁먹고 있었는지.


 한 5분 정도 보트를 타고 나갔을까, 할아버지가 대충 몇 가지 기술을 알려주더니 그냥 바다에 들어가라는 거야. 같이 바다에 뛰어들어 할아버지 팔을 그때 그 레일처럼 꼭 붙잡고 바다에 동동 떠서 수경으로 바닷속을 보고 있었는데, 해안가 근처 바닷가라 속이 그렇게 잘 보이지는 않았어. 똑바로 서서 해수면을 바라보면 사람들의 엉덩이가 둥둥 떠있는 게 보이는데, 다들 그렇게 바닷속을 바라보는 모습이 어찌나 웃기는지.... 나중에 알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떠있는 곳을 쫓아가면 바다거북을 만날 수 있대.


 어찌 됐든, 바다도 그렇게 깊진 않았어서 발끝을 날카롭게 세우면 간신히 발도 닿길래 다행이다 싶었지. 그런데 아저씨가 갑자기 나보고 구명조끼를 벗으라는 거야. 수영 못 한다고 했는데도 괜찮대, 수영 배우면 된대. 그러더니 당황한 나에게서 구명조끼를 가져가 멀리 던지더니 그냥 할아버지를 쫓아오라는 거 있지?


 머릿속으로 한국 수영장의 엄청난 커리큘럼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그때 할머니를 쫓아다니면서 수영이라도 잘 배워둘 걸, 다 커서 이게 무슨 날벼락일까 싶었지만 할아버지 놓치면 그대로 바다로 가라앉을까 싶어서 팔을 끌어안고 발장구를 열심히 쳤어. 오리발 때문인지 생각보다 쉬이 가라앉지도 않았어서 생각보다 금방 자신감이 생기더라고. 할아버지가 나한테 잠수를 가르쳐줬어. 바닷속을 보려면 잠수를 해야 한대. 그러더니 내 팔을 잡아서 바닷속까지 꾹 눌러 데리고 가는데, 숨도 차고 무섭고 정신도 없더라. 이번엔 불소향 물도 아니고 정말 짠 바닷물이 들어오니까 코도 매웠어. 그래도 바다가 깊지는 않았던 데다가 생각보다 수영이 할 만해서 잠수를 몇 번 해보고 할아버지를 부표 삼아 열심히 쫓아다녔어. 할아버지가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길래 수경으로 바닷가를 쏙 들여다봤는데, 글쎄 내 몸통만 한 바다거북이가 느릿느릿 바닷가를 헤엄치고 있더라니까. 그 낯선 광경에 홀려서 발장구도 멈추고 바다거북이를 한참을 쳐다봤는데, 사람이 익숙한 지 발 근처에서 이리저리 헤엄치는 게 꽤나 신기했어.


 그렇게 한참을 놀고 나니 다른 곳으로 가야 한대. 할아버지는 얕은 바다에서 나에게 수영을 가르쳐주고, 더 깊은 바다로 보트를 타고 나갈 계획이었던 거야. 그 계획이 어찌나 정확했던지, 오리발을 한 껏 믿고 자신감이 넘쳤던 나는 더 이상 바다가 무섭지 않았어. 보트를 타고 한참 나간 바닷가에서 더 여러 번 깊게 잠수를 하고, 사람의 흔적이 덜 닿는 곳일수록, 말도 안 되는 광경을 선물 받았어. 아쿠아리움 어항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어. 물은 어찌나 맑은지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색색깔 물고기가 내 팔을 스쳐 지나가 얼굴 옆에서 헤엄을 치더라니까. 해양 다큐멘터리를 눈앞에서 보는 것 같았어.


 바다가 무섭다고 우는 소리를 내던 내가, 혼자 풀어놓아도 잘 떠다니니 할아버지는 그게 꽤 뿌듯했던 모양이야. 베스트 스윔 티쳐라고 칭찬을 잔뜩 해 드리면서,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어. 할머니, 나 이제 바다에서 수영도 할 수 있어. 물고기도 많이 봤고, 잠수도 할 수 있어. 할머니도 수영을 참 잘했는데, 건강했다면 할머니도 이런 바닷가에서 정말 재밌는 구경을 많이 했었을 거야. 우리는 내륙에 살았어서, 바다보다는 계곡을 많이 갔었지만, 할머니도 바다 수영을 정말 잘했을 거라고 생각해. 엄마도 할머니를 닮았는지 수영을 좋아해. 엄마도 바다 수영을 좋아해서, 어느 날은 바닷가에 뛰어들어 해파리에게 물려온 적도 있었어. 이런 경험들을 할머니와 함께 했으면 정말 좋았겠다 생각해. 그래도 스스로 위안을 위해, 나는 항상 마음 한 켠으로 내가 경험한 이 모든 순간에 할머니가 함께 있었을 거라고 믿어. 수영을 가르쳐줬던 주름이 자글자글한 발리 할아버지의 미소에서도, 나는 할머니를 찾았으니까.


길리 트라왕안에서, 손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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