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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육진심 Mar 22. 2024

‘아직 없음’을 견디며 ‘이타적 이기심' 키우기

아이와의 건강하고 행복한 관계(굿 핏)를 위한 힘

“아빠가 아니라 할아버지예요!”     



머리끝까지 성질이 난 5살 지호는 발을 쿵쿵거리며 당황한 과일가게 김사장을 쏘아봅니다.


“그래. 알았어. 아빠 아니고 할아버지라고? 할아버지가 젊어서 좋겠다."  

 

옆에 서서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지호의 할아버지, 민준 씨의 얼굴은 종잇장 구겨지듯 일그러집니다.

   

지호가 좋아하는 사과를 사들고 오는 길, 얼마 전 집을 나간 엄마가 보고 싶어 제 감정을 못 이기고 자주 화를 내는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민준 씨는 마흔다섯의 나이에 손주를 떠맡아 키우는 자신의 신세가 답답하기만 합니다.


열아홉에 집을 나와 정비소에서 일하던 민준 씨는 옷가게에서 일하던 여자친구와 스무 살에 결혼을 했습니다. 딸 하은이를 낳았지만 가난을 버거워하던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고 그렇게 아이와 둘만 남겨졌죠.   

 

민준 씨는 스스로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아이에게 돈만 주고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았고, 쉬는 날에도 아이를 데리고 외출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어쩌다 딸과 마주 앉아 밥을 먹는 날에는 음식 씹는 소리만 들리는 시간이 고문처럼 느껴졌습니다.      


고등학생이 된 딸이 짐을 챙겨 집을 나간 날, 민준 씨는 화가 난다기보다 서글펐습니다.

아내가 떠나고 난 후 오랜 시간 쌓였던 삭인 감정이 구토처럼 밖으로 나와 한참을 울었지요.     


몇 년 동안 연락도 없던 딸은 지호를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맹랑하게도 원래부터 살았던 자신의 집인 양 허락도 없이 들어와 방 한 칸을 차지했죠.

세 살이었던 지호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특히 처음 만난 할아버지가 어디서 등장한 건지 궁금했죠.      

아빠 대신 할아버지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듯 지호는 할아버지를 잘 따랐습니다.

처음에는 옆에 붙어 밥을 먹더니 같이 목욕을 하고 이젠 한 이불에서 잠도 자게 되었죠.


그래서였을까요? 딸은 지호를 두고 18살 그때처럼 말없이 떠났습니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다며 우는 아이를 안고 아련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민준 씨의 몸이 흔들렸습니다. 지진이 난 것처럼 심장에 금이 가고 피가 새어 나오는 것 같았죠.      


딸과 둘이 남겨졌던 그때보다 더 암담하고 막막했습니다.      


민준 씨는 예전과 같은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호를 잘 키우기 위해 필요한 영상을 찾아보고 책도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부끄럼이 많아 낯선 사람에게 말도 잘 못 걸던 그가 주변의 부모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요청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호가 자신을 할아버지라며 선을 그을 때면, 수치심이 홧홧하게 피어오릅니다.

하지만 저녁이면 어김없이 품에 파고드는 지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자면, 서운함과 걱정 따윈 다 사라집니다.      


민준 씨는 지호에게 좋은 할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엄마와 아빠의 빈자리가 티 나지 않도록 말이죠.      


그런 지호의 할아버지, 민준 씨에게 두 가지를 기억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먼저, 아이와 건강하고 행복한 관계를 이루고 싶다면, ‘아직 없음(not yet)’을 견디는 힘을 키우시길 바랍니다. 


     

아직 일어나진 않았지만 곧 일어날 거라고 믿으며 걱정하는 경우를 ‘예기 불안’이라고 하는데요.

처음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양육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대한 불안을 자주 느끼곤 합니다.      


부모는 언제나 아마추어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아이가 한 살 때 보이는 행동과 두 살 때 보이는 행동은 다르기 마련인데, 한 살 때의 행동에 적응해서 잘 반응할 수 있음 쯤 되면, 어느새 아이는 자라고 새로운 모습을 보이니까요.

그러면 그 발달 수준에 맞는 대응방법을 고민해야 하죠. 그러니 육아에 익숙해지기가 힘든 겁니다.   


다둥이 부모는 좀 나을 것 같지만, 아이마다 기질과 성격이 다르니, 아이가 많다고 해서 "육아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죠.      


불안의 수준이 높아지면 익숙한 것에만 의존하게 됩니다.

본인이 무언가를 아직 갖고 있지 않은 상태를 견디기 힘들어하죠.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는 일에도 아이의 안전을 강박적으로 걱정하고 확실하고 정확한 정보만 선호하며 규칙과 질서를 과도하게 적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집이 지저분하거나 아이가 순서나 규칙을 지키지 않거나(혹은 배우자나 가족이), 상대의 의사 표현이 모호하거나,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한 규정이 명확하지 않거나, 심리적인 안정이 깨지면, 이를 참지 못하고 초조해합니다.      


민준 씨도 지호를 잘 키우고 싶은 마음에 앞으로 일어날 일에 철저히 대비하고자 다른 부모에게 조언을 구하고 양육 관련 영상과 책을 보지만, 걱정이 사라지지 않는 거죠. 스스로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니까요.


그래서 저는 ‘아직 없음(not yet)을 견디는 힘’을 강조합니다. 

'아직 없음(not yet)'을 견디는 힘은 양육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게 해 줍니다.

‘아직 없음’은 현재 내가 무언가를 갖고 있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응할 능력이 ‘아직’ 없고, 그래서 아이와의 사이에서 발생할 갈등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직’ 모릅니다.

언제 화가 나서 아이에게 짜증을 낼지 ‘아직’ 알지 못하고, 아이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남지 않는 대화를 하는 법도 ‘아직’ 모릅니다.

아이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기술도 ‘아직’ 서툴고, 아이와의 경계를 지키며 사생활을 존중하는 것도 ‘아직’은 어렵습니다.

아이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치고 싶은데 나조차 옳고 그름의 기준이 ‘아직’ 명확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행복한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지만 ‘아직’ 행복의 의미에 대해 나름의 정의도 갖고 있지 않죠.   

   

그렇게 나는 ‘아직은 없는(not yet)’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면 ‘아직’은 ‘영원히’와는 다른 개념이니까요.

‘지금’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나에게 그것이 ‘영원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없는’ 상태를 견뎌야 ‘언젠가 있을’ 상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아직 없는’ 현재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와는 다릅니다.


내가 불안한 이유는 ‘완전히 있는’ 상태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이 모두 갖춰져야 한다는 강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다가올 미래의 나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예측하지 못합니다.      


‘아직 없음’을 견디는 힘을 기르고 싶다면, 두 번째인 ‘이타적 이기심’을 연습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이기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을 구분해서 봅니다.


이기적인 태도는 자신만의 욕구를 위해 타인의 이익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말하는 ‘이타적 이기심’은 ‘나를 위한 것이 상대를 위한 것’이 될 때를 의미합니다.      


민준 씨는 갑자기 어린 손주와 살게 되면서 삶의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겁니다.

딸에게 온전한 사랑과 관심을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그동안 자신이 좋아하던 취미 생활이나 여행, 친구들과의 만남도 포기하고 손주를 돌보는 일에만 집중할지도 모릅니다.      


어린 시절 부모와 충분한 사랑을 나누고 건강한 애착을 이루지 못한 부모의 경우, 자녀에게 자신이 받지 못한 것을 보상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의 즐거움과 만족은 외면하고 아이의 욕구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희생과 헌신’이라는 이름 하에 심리적 에너지가 소진되고 마음은 빈털터리가 되고 말죠.      


이전 글에서도 말씀드리지만 부모의 마음은 연료가 있어야 작동하는데 채우지는 않고 쓰기만 하니 엔진이 멈출 수밖에요.


그러니 나를 위한 일이 아이를 위한 일이 되는 ‘이타적 이기심’을 기억하고, 나의 심리적 연료를 충전하기 위해 일상의 중심을 아이에서 나로 가져와 보세요.      


일주일에 하루, 혹은 몇 시간이라도 나를 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맞벌이에 가사와 육아를 하다 보면 나를 위한 잠깐의 시간도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부부가 일주일에 하루씩 번갈아 아이를 돌보며 각자에게 ‘이타적 이기심’을 발휘할 기회를 주는 겁니다.      


문제는 이 시간을 그저 시간이나 물질을 소비하는 데에 쓰면 나만을 위한 '이기심'을 보이는 거죠.


진지하게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 무엇인지 성찰한 후 주어진 기회를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면 이 기회의 목적엔 ‘이타심’도 포함이 되어 있으니까요.

나만을 위한 하루를 보내고 난 후에는 연료가 채워져 가족과 나를 위해 쓸 수 있어야 하죠.      


한 엄마는 신나게 벨리댄스를 추고 옵니다.

그런데 그냥 추는 게 아니라 노인분들에게 벨리댄스를 무료로 교습하며 즐거움과 보람을 동시에 느낍니다. 그리고 나면 활력이 생겨 아이를 돌보는 일에 탄력이 붙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이타적 이기심’은 이렇듯,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에너지를 충전했는데, 그게 다른 사람의 에너지도 채워주는 겁니다.

부모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에너지를 충전해야, 아이에게 쓸 심리적 에너지가 생깁니다.
심리학자인 매슬로는 반대되는 요소들을 하나로 엮어 통합을 이룰 때, 한쪽을 얻으면 한쪽을 잃는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타심'과 '이기심'과 같이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를 하나로 통합하면, 아이와의 관계에서 나만 행복하거나 반대로 아이만 행복하게 되는 함정에 걸려들지 않을 수 있죠.


그러니 부모인 나를 돌보는 일에 소홀하지 마세요.

그리고 중요한 건, 육아 또한 '아이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아이의 삶에 관심을 갖고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챙겨주며 아이의 성장을 돕는 ‘이타심’은 나를 위한 ‘이기심’과도 통합되어야 하니까요.      


아이와의 관계에서 아이만을 위해 나의 ‘이타심’만 발동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멈추고 소외된 나의 ‘이기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모순된 두 가지가 하나로 만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조화를 이뤄내죠.     

 

‘아직 없음(not yet)’을 견디는 힘과 ‘이타적 이기심’이
모순된 두 가지가 통합되어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처럼,
어찌 보면, 부모와 아이 사이도 '서로 다른 우리’가 만나 하나 되어
매일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건 아닐까요?   
  

아이와 굿 핏을 이루고 싶다면, ‘아직 없음(not yet)’을 견디는 힘과 ‘이타적 이기심’을 연습해 보세요.


내가 바라는 목표가 '아직은 없지만 조금씩 채워질 거라는 희망'과 ‘나를 위한 것이 아이를 위한 것이라는 믿음'이 현실이 될 겁니다.



참고문헌

 Msalow, A. (2021). 동기와 성격(오혜경 역). 경기: 연암서가.    


사진출처

https://www.pexel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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