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보조 이야기 157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by 강용원

반제국주의 의학 서사 71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여성이 남성과 다름을 인정하는 의학이다: 『이브의 몸』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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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관절은 남성보다 느슨하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호르몬(에스트로겐과 릴랙신) 농도가 월경주기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에스트로겐은 힘줄과 질긴띠(인대) 콜라겐 형성 속도를 늦춘다. 그래서 월경주기 가운데 에스트로겐 수치가 치솟는 배란기에 특히 부상이 잘 일어난다.···릴랙신은 에스트로겐과 마찬가지로 콜라겐 전환을 촉진하고 관절을 고정하고 있는 힘줄과 인대를 느슨하게 한다.”(261-262쪽)


마을 의료기관에서 가장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 가운데 하나가 손목이나 발목이 삐어서 오는 사람에게 하는 치료다. 병 자체도 그렇거니와 치료 내용도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질병 상태를 알기 위한 간단한 문진을 제외하고는 어떤 대화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치료 방식이 다를 뿐 한의사든 정형외과 양의사든 기본적으로 보여주는 같은 제국주의 백색의학 일상이다. 이 일상에서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화들짝 깨어난다. 손목이나 발목이 삐어서 오는 여성일 경우, 필수다. 배란기를 확인한다. 월경주기·임신·출산에 따른 손·발목 관절 문제를 이야기한다. 사실 이 정도만으로도 제국주의 백색의학과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확연히 구분된다. 내친김에 이야기를 좀 더 넓힌다.


관절이 어디 손·발목뿐인가. 손·발가락, 팔꿈치, 어깨, 목, 등, 허리, 넙다리, 무릎···그러고 보면 관절이 아니면 몸이 아니다. 몸이 아니면 생명이 아니다. 생명으로서 펼치는 실천, 관계, 안정, 균형, 지지, 표현, 지향들이 모두 관절에서 나온다. 실천, 관계, 안정, 균형, 지지, 표현, 지향들에서 여성은 남성과 다르다. 개인 생리뿐만 아니라 사회문화, 정치·경제적 지평에서도 다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열악한 조건 속에 놓인다. 이 조건 때문에 여성은 더 많은 관절병에 걸린다. 한 여성이 반복해서 관절병으로 찾아온다면 반제국주의 녹색의사는 반드시 그 여성 삶 전반을 점검해야 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사는 발목 삐어서 무심코 침 맞으러 온 여성 인생 문제를 숙의할 줄 아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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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 사용 긴장성 손상(RSI)은 힘줄, 관절, 근육을 긴장시키는 특정 동작을 계속 되풀이하는 경우 일어난다.···

여성은 반복 사용 긴장성 손상에 더욱 취약하다. 대부분 사무기기가 남성을 대상으로 설계된 사실을 부분적 이유로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여성은 ‘자판을 두드리는 일’에 남성보다 많이 종사한다.”(264쪽)


여성이 남성과 다르다고 하면 으레 떠올리는 통속한 이미지만으로도 제국 백색 문명은 충분히 통속하다. 통속한 눈에는 “대부분 사무기기가 남성을 대상으로 설계된 사실”이란 진실이 들어오지 않는다. 통속한 눈에는 “여성은 ‘자판을 두드리는 일’에 남성보다 많이 종사한다.”라는 사실이 들어오지 않는다. 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이 사실에서 비롯한 RSI를 제국 백색 문명이 주목할 리 없다. 주목했다면 사무기기 시장 풍경이 달라졌으리라. 주목했다면 직업 남녀 불평등 구조가 달라졌으리라. 이 부질없는 이야기를 부질없이 하는 까닭은 뭔가.


이치를 따지자면 우리 이야기는 순서가 거꾸로 되었다. 제국 백색 문명이 자기 보전 근간으로 먼저 남녀 불평등 구조를 만들었고, 그 구조 유구함이 도저한 통속함으로 쌓인 셈이니 말이다. 통속함에서 놓여나려면 본진으로 단도직입해야 한다. 제국 백색의사가 그 눈으로 RSI에 주목한대봐야 오십보백보다. 자신이 빠져 있는 문명 함정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인문적 눈을 떠야 한다. 의사이기 전에 인간인 근원 조건으로 진입해 사유하고 성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한 발을 앞으로 들어 넘어질 위기 속에 투신부터 해야 한다.


그다음, 허공에 띄운 발을 더 앞으로 내밀고 몸 전체 무게 중심을 이동시켜 위기를 증폭시킨다. 마지막으로, 안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다른 발로 힘차게 기존 땅을 뒤로 밀어 위기를 극대화한다. 그러면 먼저 나간 발이 새로운 땅에 닿으며 새로운 안정을 준비한다. 새로운 안정은 찰나적이다. 바로 다음 순간 다른 무너짐이 시작되니 말이다. 그렇다. 근원에 이르려는 자는 끊임없이 걸어 나아가야 한다. 제국 백색 문명은 정지, 그러니까 제자리에서 같은 동작을 영원히 반복하려는 탐욕에 사로잡혀 있다. 제국 백색 문명은 RSI 그 자체다.


제국 백색 문명이 RSI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생긴 이익은 0.1%가 가져가고 손실은 99.9%가 짊어진다. 99.9%는 아래로 갈수록 여성이 많아진다. 그 여성은 다시 겹겹 RSI를 뒤집어쓴 채 살아간다. 팡이실이 녹색 문명은 제국 백색 문명 등을 떠민다. 한 발을 앞으로 들어라, 촉구한다. 무게 중심을 앞으로 기울여라, 독려한다. 다른 한 발을 뒤로 힘껏 밀어라, 손뼉 친다. 그리고 구호를 외친다. 근원을 향하라. 인간을 향하라. 평등을 향하라. 자유를 향하라. 평화를 향하라. 사랑을 향하라. “La marche est spiritualité, elle nous connecte à l’uni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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