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Pork Steak 정찬

마감세일 돼지고기 한팩의 변신.

by 우연의 새

일요일은 늘 힘들다.


끝나가는 주말과 다가올 월요일에 대한 압박으로 심신이 급속도로 피로해진다. 특히나 두 딸들은 미뤄둔 학교와 학원 숙제를 일요일 낮부터 시작하므로..일요일 저녁쯤엔 네가족 모두 기분이 좋지 않다.


그래도...저녁은 먹어야지. ㅎㅎ 뭘 먹나..


요새 나, 남편, 아이 둘다 많이 지친 느낌이었다. 일도 많고 공부도 많은 건 당연하지만, 그 외에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버거운 일들이 많았어서 요새 이상하게 네명이 같이 앉아있기만 하면 (그럴 시간도 요샌 별로 없지만) 툭탁거리고 싸우는 것 같다. 특히 내가 요즘 예민하고 피곤했어서 가족들이 내 눈치를 많이 보는 것 같다.


원래는 즐겁기만 하던 토요일이지만 이제 학원스케줄로 꽉 찬지가 꽤 됐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큰 딸의 학원 수업 후 귀가가 밤 9시를 넘기니..네 가족이 여유있게 즐기는 토요일은 이미 옛말이 된지 오래. 날씨가 너어무 좋은 봄날인데 하루종일 공부와 씨름하고 그 뒷치다꺼리하는 엄마인 나도 같이 우울해진다.


그래서 어제 충동적으로 온가족이 마트 밤마실을 갔다. 기분전환겸.


고질적인 주차 문제와 혼잡으로 유명한 동네 대형마트인데 토요일 10시 다 된 시각은 텅 비어있었다. 대신 물건도 많이 빠져있고..어차피 딱히 살 것이 있어서 간 것이 아니어서 부담없이 둘러보며 충동적으로 몇가지를 집어들었다.


요새 한창 많이 보이는 참외도 집어들고 아침에 좀 건강하게 먹어볼까 하고 그래놀라도 몇팩 집고..고기코너를 기웃거리는데 듬성듬성 빈 쉘프 한쪽에 세일하는 제주 흑돼지 등심이 있었다.


체구가 크지 않은 두 딸에 남편과 나까지 우리 넷 다 소식자인데다 매끼 고기를 찾는 스타일도 아니지만, 워킹맘의 냉장고에 고기가 떨어지면 늘 불안해진다. 아직 성장기 아이들 끼니를 돌봐야하니 더더욱 그렇다. 비상시엔 고기 구워서 밥하고만 대령해도 되니..누군가는 먹겠지 싶은 마음에 흑돼지 등심이 카트 속으로.


다음날 일요일 저녁. 모두가 가장 극혐하는 시간이다. 의무와 책임만이 남은 시간. 외식을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꾸역꾸역 냉장고 문을 열었다. 뭘 먹지? 스캔 후 1차 픽은,


- 마트 떨이 제주 흑돼지 등심

- 남편이 다이어트하겠다고 사놓고 안 먹어서 죽기 직전인 미니파프리카

- (언제 샀는지 알 수 없는) 감자 몇 알

- 지난 겨울 대용량으로 산 무농약 curly kale


이걸 어떻게 변신시켜볼까.


- Romesco : 소스 중에 Romesco라는 것이 있다. (아래) 파프리카 (보통은 빨간) 를 직화로 새까맣게 그을려서 부드럽게 만든 후, 겉면의 탄 부분을 긁어내면 완전 말랑하고 부드러운 단 맛만 남은 파프리카 속살만 남게 된다. 그 속살을 다지고 마늘, 올리브오일, 소금, 후추 등을 섞으면 파프리카의 단맛과 마늘의 감칠맛 등이 너무 잘 사는 매력적인 소스가 된다. 고기, 야채 등등 그 어디에도 잘 어울린다. 난 아래처럼 정석으로 만들 것은 아니고 그냥 이 조합에서 영감을 얻는 정도로..치자.















- Pork Steak : 이름이 거창하지 그냥 돼지 등심 스테이크. 무쇠팬에 소금후추로 간단하게. 하지만 킥은 너무, 완전 빠싹 다 익히지 않는 것이다. 보통 돼지고기는 빠싹 익혀먹어야한다고 하는데 얇은 삼겹살 같은 것은 그렇게 먹으면 나름 바삭한 맛이 있지만 보통 서양식은 두툼한 스테이크를 많이 먹는데, 두툼한 스테이크를 속까지 바싹 익히며 통나무 먹는 맛이 난다. 소고기처럼 핏물 줄줄은 아니지만, 돼지고기도 살짝 핑크빛 도는 정도가 위생에도 문제없고 맛도 좋다고 한다.


- Roasted Potatoes : 이 역시 이름이 거창하지만..(대부분의 서양음식이 그런 것 같은데 이름은 뭔가 그럴듯 어려워보이나 그냥 소금후추 간 해서 익히는 요리) 감자를 오븐에 굽는 요리. 하지만 난 고기를 굽고 나면 팬에 맛있는 돼지기름이 남으니 그 팬에 감자를 익히기로. 킥은 감자를 먼저 삶는 것이다. 경험상 감자가 우스워보여도 진짜 잘 안 익는다. 팬이나 오븐으로만 익히려면 완전 오래 걸림. 한번 삶아서 팬이나 오븐에 익히면 시간도 절약되고 안은 포슬하고 밖은 바삭.


- Sauteed Kale : 우리나라는 대부분 쌈케일이 많다. (거의 유일한 유통 품종) 그런데 해외에선 curly kale이라는 것을 많이 먹길래, 해외레서피들을 보면서 너무 궁금했는데 몇년전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curly kale을 파는 곳을 발견. 개인 농부이시고 대용량으로만 주문판매받으셔서 1년에 한번 정도 2킬로에 달하는 케일을 구매한다. 그런데 케일이 잎도 두껍고 뭔가 보관성이 좋은지 소분해서 지퍼백에 넣어서 김치냉장고에 넣어놓으면 정말 오래 간다. 겨울 내내 (겨울에 주문) 먹을 수 있음. Dark leafy green으로 분류되는 케일은 슈퍼푸드라고도 하고..그런데 결정적으로 정말 맛있다. 뭐랄까..약간 양상추처럼 여린 채소와 단단한 브로콜리의 중간 느낌? 결정적으로 익혀지면 더 진하고 약간 meaty한 맛이 난다. 녹색채소 별로 안 좋아하는 우리집 두 어린이들도 좋아하심. 요 케일을 그냥 올리브오일, 소금, 후추로만 요리해도 굿.



처지는 일요일 저녁이지만 바쁘게 요리를 시작. 오히려 요리를 시작하면 뭔가 기분이 더 업된다.


일단 로메스코 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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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파프리카를 직접 가스불에서 그을리고 거의 겉을 다 태우고 그릇에 넣고 랩을 씌워놓으면 스팀이 되고 물렁해진다. 물렁해진 파프리카의 겉에 있는 그을은 부분을 긁어내면 빨갛고 보드라운 파프리카 속살이 드러남. 이걸 잘게잘게 썰고 다진 마늘, 소금, 후추, 올리브유를 넣어서 대충 소스 질감으로 만들면 완성.


다음은 돼지고기 스테이크와 케일요리. 별것 없다. 롯지 무쇠팬을 뜨겁게 달구고 기름 두른 후 익히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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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감자요리. 역시...이하동문. ㅋㅋ 단, 위에 말한 대로 꼭! 한번 미리 삶아야한다. 그리고 기름 두른 팬에 자글자글 구우면 감튀 뺨치는 요리.



















이렇게 하여 일요일 저녁 한상은 아래와 같이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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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탄 음식에 알러지 수준으로 거부감을 보이는데, 난 정말 새까매서 숯처럼 부스러지는 것이 아닌 이상 다 먹는다. 오히려 그 정도로 charred된 음식 완전 선호! 그래서 저 위의 감자가 저렇게 Dark golden brown. Garlicky kale도 너무 맛있고, 고기야 뭐...늘 맛있지. ㅋㅋ


한가지 특이점은 우리집은 쌀밥에 큰 집착이 없어서 저렇게만 놓고도 잘 먹는다. 감자가 탄수화물이기도 하고, 저런 구성이면 밥이 필요없기도 하고.. 기분내며 아이들한테 나이프도 쥐어주고 어른들도 야매 로메스코 소스 콕콕 찍어가며 잘 먹었다. 네명 다 소식가여서 양이 많지 않지만 다들 배부름.


설거지가 쌓였지만, 설거지는 남편 몫. ㅎㅎ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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