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와 거리
"추운 겨울날, 여러 마리의 고슴도치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 서로에게 바싹 다가가 몸을 붙였다. 하지만 서로의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 아픔을 견딜 수 없었고, 결국 다시 멀리 떨어져야만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혹독한 추위가 다시 덮쳐왔다. 고슴도치들은 다시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서로의 가시에 찔리지 않으면서도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최적의 거리를 찾아냈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들려준 ‘고슴도치 딜레마’라는 우화이다.
우리는 모두 관계라는 광활한 우주 속에 살아간다. 가족, 친구, 동료, 연인 등 수많은 이름의 행성들 사이에서 각자의 궤도를 그리며 공존한다.
이 관계들은 마치 우주의 천체들처럼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영향을 미치며 하나의 거대한 중력장을 형성한다.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겨 충돌할 듯 가까워지기도 하고, 때로는 알 수 없는 힘에 밀려 멀어지기도 하다가,
어느 순간 미묘한 균형을 이루며 안정적인 상태에 접어든다.
이 모든 관계의 춤 속에서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상대방과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끊임없이 조절한다.
인간은 친밀감을 원하면서도, 그로 인해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한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욕구가 충돌하며 겪는 심리적 긴장 상태가 바로 고슴도치들이 겪는 딜레마의 핵심이다.
흥미롭게도, 고슴도치들이 찾아낸 이 ‘최적의 거리’는 우주에도 존재한다.
태양과 지구라는 거대한 두 천체 사이에도, 서로의 중력과 원심력이 상쇄되어 어느 쪽으로도 끌려가지 않는 안정적인 평형을 이루는 ‘라그랑주 점(Lagrange Point)’이라는 공간이 있다.
이 기적의 균형점에서 인공위성은 최소한의 에너지로 자신의 위치를 지킬 수 있다. 어느 한쪽으로 추락하지도, 텅 빈 우주로 날아가 버리지도 않는다.
이 우주적 원리는 고슴도치들의 거리두기 지혜와 맞닿아 있으며, 인간관계의 본질과도 유사함을 가진다.
인간관계에도 두 사람이 서로에게 너무 가깝지도(가시에 찔려 상처받는 거리), 너무 멀지도(추위에 떠는 거리) 않게 각자의 고유한 존재를 존중하며 편안하게 공존할 수 있는 최적의 지점, 즉 ‘관계의 라그랑주 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관계라는 우주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기심과 개성이라는 ‘가시’를 가진 채, 고독이라는 ‘추위’를 이겨낼 수 있을까?
우주에는 마치 중력이 사라진 듯한 아주 특별한 공간이 있다.
이 공간에서는 어떤 물체가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두 천체와의 상대적 위치를 유지하며 안정적으로 머무를 수 있다.
이는 마치 호수의 잔잔한 곳에 부유물이 모여 흩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그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이 신비로운 공간을 '라그랑주 점'이라 부른다.
이 발견은 현대 우주 탐사와 개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최소한의 연료만으로 우주선을 특정 위치에 반영구적으로 고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장기간의 관측 임무를 수행하는 태양 관측 위성이나 우주 망원경, 나아가 미래에 건설될 우주 정거장 및 전초기지에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우리가 속한 태양-지구 시스템에는 총 다섯 개의 라그랑주 점(L1, L2, L3, L4, L5)이 존재하며, 각 지점은 서로 다른 위치와 특성을 가진다.
《불안정한 평형: L1, L2, L3》
L1, L2, L3는 태양과 지구를 잇는 일직선상에 위치하며, 마치 좁은 언덕 꼭대기에 공을 올려놓은 것처럼 불안정한 평형 상태를 유지한다. 이를 준안정(unstable) 평형점이라 부른다.
이곳에 위치한 물체는 약간의 위치 이탈에도 원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점점 더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 공간에 배치된 우주선은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주기적으로 추진 장치를 가동하여 궤도를 유지해야 한다.
이는 끊임없는 노력과 의식적인 거리 조절이 필요한 다양한 인간관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먼저, 태양과 지구 사이에 위치한 L1은 지구의 방해 없이 24시간 내내 태양을 관측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태양 관측 위성인 SOHO, DSCOVR 등이 이 지점에 위치해 있다.
지구에서 태양 방향으로 약 150만 km 거리이며, 지구-달 사이 거리(약 38만 km)의 약 4배에 해당한다.
사랑에 비유하자면, '밀당'의 관계에 해당된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관계가 어긋나기 쉬운 상황이다.
지구의 뒤편 150만 km 거리에 위치한 L2는 지구라는 거대한 방패 뒤에 숨어 태양의 빛과 열을 피할 수 있다.
'우주의 그늘' 역할을 하므로, 매우 차가운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정밀 관측 장비인 제임스 웹이 바로 이곳에서 우주를 관측하고 있다.
이곳은 추운 지역이다. 사랑이나 관계의 열기가 진심으로 지속되지 않으면 쉽게 식어버릴 수 있다.
태양의 정반대 편, 지구 궤도의 건너편에 존재하는 L3는 지구에서 3억 km로 너무 멀고 항상 태양에 가려져 있어 소통이 거의 불가능하다.
과거에는 이곳에 미지의 행성, 즉 '카운터 지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곳은 과거의 관계에 비유된다. 이제 그에게는 또 다른 그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안정적인 오아시스: L4, L5》
L4와 L5는 태양과 지구를 꼭짓점으로 하는 정삼각형을 이루는 위치에 존재한다.
L4는 지구의 공전 궤도보다 60도 앞서서 움직이고, L5는 60도 뒤처져서 따라온다. 지구에서 1억 5천만 km로 지구와 태양 간 거리와 비슷하다.
이 두 지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매우 안정적인(stable) 평형점이라는 것이다. 마치 그릇의 바닥처럼 움푹 파인 지형과 같아서, 이곳에 놓인 물체는 외부의 웬만한 교란에도 원래의 안정된 위치로 되돌아오려는 성향이 강하다.
이러한 탁월한 안정성 덕분에 L4와 L5에 위치한 물체는 궤도 유지를 위한 연료 소모가 거의 필요 없다. 미래의 우주정거장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는 인간관계의 틀이 잡혀 균형을 이룬 상황과 비슷하다. 하나의 모임이든 사랑이든 더 이상 감정의 소모 없이 사랑과 소속감을 느낀다. 그래도 지나친 충격은 궤도를 이탈시킬 수 있다.
레바논 출신 문학가 칼릴 지브란 (Kahlil Gibran)은 그의 저서 『예언자』에서
"함께 서 있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서 있고, 참나무와 사이프러스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는 라그랑주 점이 만들어내는 '안정적인 시스템'을 건축에 비유하고 있다.
두 개의 기둥(사람)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하나의 아름다운 사원(관계)을 함께 지탱할 수 있다는 이 말은, L4, L5 같은 안정 평형점의 원리를 시적으로 보여준다.
우주의 라그랑주 점과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에도 각자의 존재를 존중하며 편안하게 공존할 수 있는 최적의 지점이 있다. 즉, ‘관계의 라그랑주 점’이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인간관계의 라그랑주 점’을 찾는 것은 먼저 ‘물리적 거리 두기'에서 시작된다.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이 제시한 '프록세믹스(Proxemics, 근접학) 이론'은 관계의 친밀도에 따라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유지하는 네 가지 공간 범주를 제시하며, ‘물리적 라그랑주 점’을 설명한다.
먼저, 연인, 가족 등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의 거리는 0~45cm이다(친밀한 거리). 즉, 내 팔의 안쪽에 있는 거리다.
친구, 동료 등 친밀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관계의 거리는 45~120cm이다 (사적인 거리). 이는, 한 발짝만 더 다가가면 친밀한 거리가 된다.
그리고, 업무적, 공식적 관계에서 유지되는 거리는 120~360cm이다(사회적 거리). 대화 시 침이 튀기지 않는 거리라고 해석된다.
강연, 연설 등 비개인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거리는 360cm 이상이라고 한다(공적 거리). 이 거리는 듣기 위해 고개를 너무 치켜들지 않아도 되는 거리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물리적 거리는 관계의 외형을 결정하며, 이 거리가 침범당하거나 멀어지면 갈등을 유발하게 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관계의 내실을 다지는 ‘심리적 라그랑주 점’이다. 이는 두 사람의 내면이 조화로운 평형을 이루는 상태를 의미한다.
먼저, ‘자기 결정성 이론 (Self-Determination Theory)’이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는 건강한 관계란 상대에게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고, 각자의 자율성을 존중하며, 관계 속에서 각자가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깊은 유대감을 나눌 수 있을 때 심리적 라그랑주 점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사회 교환 이론 (Social Exchange Theory)’ 에서는, 인간관계를 비용과 보상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즉, 관계에서 얻는 보상(사랑, 지지)이 지불하는 비용(감정 소모, 희생) 보다 크다고 느낄 때 관계는 유지된다고 한다.
어떤 이론이 됐든, 우선은 그 관계의 목적과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나는 이 사람과 어떤 사이인가?’, ‘이 관계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을 통해 관계의 좌표를 명확히 해야 그에 맞는 적정 거리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SNS는 물리적 거리를 초월한 거대한 디지털 우주를 창조했다. 우리는 이 공간에서 끊임없이 연결되지만, 이러한 초연결성은 때로 심리적 피로감을 안겨준다.
이 새로운 우주에서도 과도한 밀착이나 소외감 없는 건강한 관계를 위한 ‘디지털 라그랑주 점’을 찾아야 한다.
자신의 디지털 욕구를 조절하고, 타인의 디지털 환경과 감정을 존중하는 ‘디지털 양보’가 필요하다고 본다.
디지털 웰빙은 불필요한 알림을 남발하지 않고, 소통의 시간을 준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고흐는 프랑스 남부의 아를에 '노란 집'을 마련하고, 자신이 존경하던 화가 고갱과 함께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 꿈에 부풀어 있었다. 1888년, 마침내 고갱이 노란 집에 합류하면서 두 천재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너무도 다른 성격, 예술에 대한 견해 차이, 생활비 문제, 청소문제, 맞지 않는 식 습관, 그리고 좁은 공간에서의 끊임없는 충돌은 두 사람의 관계를 빠르게 파멸로 이끌었다.
궂은 날씨로 인해 집 안에 갇혀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던 1888년 12월 23일 저녁, 두 사람 사이에 격렬한 언쟁 끝에 결국 동거 9주 만에 고갱이 집을 나갔다.
고흐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갈등 끝에, 자신의 귀를 자르는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By 빈센트 반 고흐 - Web Museum (file),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9856 출처 위키백과
서로를 향한 존경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심리적, 물리적 거리를 확보하지 못하자 관계는 서로를 파괴하는 무기가 되었다.
이는 아무리 좋은 관계라도 각자의 독립성을 존중하는 '경계'가 없을 때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슴 아픈 교훈이다.
그렇다. 우주의 라그랑주 점이 눈에 보이지 않는 중력과 원심력이 빚어낸 절묘한 쉼터이듯,
인간관계의 라그랑주 점 역시 적절한 거리 유지와 보이지 않는 애정과 존중이 빚어내는 섬세한 균형의 산물이다.
이제, 우리 각자의 관계들이 라그랑주 점의 어느 위치에 있는지 확인해 볼 때이다.